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임마누엘이었다. 나사렛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만한 복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이가 임마누엘이요 또 예수가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왔다면 기독교는 종교의 낡은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또한 오늘의 우리가 `아들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아직 메시아 예수의 처녀 잉태에 동의를 하지 않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그러한 것이면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한다는 타종교나 사회 지성들이 처녀 탄생자인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기독교인 임을 자임한다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처녀 탄생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은 왜 믿으려 하지 않는가. 합리와 이성이 거부하고 자연법이 용납지 않기 때문인가? 그럼 종교가 자연법과 이성법의 범주 안에 머무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가.   바로 잡아야 한다. 성경대로 믿기로 하자. 처녀가 잉태한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분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분이다. 어떻게 인간이, 육신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요한 복음 17장을 보라.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하시며 자신감 넘치는 고백을 하였다. 인간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창조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침하는 사람, 아버지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또 그 안에, 그리고 아들을 믿는 저들(우리들)이 함께 우리 안에 있을 것까지를 힘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산 예수를 보며, 그 예수가 내게 있어서 내 생명의 중심이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토록 영화로왔다면 우리들 믿음의 사람들 또한 그토록 크고 또 드넓은 세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것도 망설일 수 없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출생의 전 과정에 동의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와 함께 아들들이 되겠는가. 처녀 탄생을 믿는다. 믿어야 한다. 저가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윗의 혈통만을 고집하여 그 씨라면, 혈육이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어찌 예수와 만날 수 있겠는가. 만약 예수가 혈통 승계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저를 내 생명의 주인으로 믿을 수 없다. 혈통을 극복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다윗의 혈통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기적으로도 불가능하며 권능으로도 가당찮은 일이 된다. 아, 은총의 마리아여! 그대의 피가 예수의 몸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나이다. 마리아여, 동정녀 마리아여, 오직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이 직접 간여하여 메시아 되신 예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메시아 되신 이시여, 내가 또 성령으로 주와 하나됨을 믿으며 창조적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들의 시대를 불러야 한다. 아들의 시대를 위하여 예수가 오셨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말씀으로 그가 오셨다. 종의 시대, 위압과 공갈 또 미신과 거짓으로 인간을 위협하여 노예로 삼아 영화를 누리던 종교의 억압에서 우리를 사단의 올무에서와 함께 자유케 하신 시대의 주인이신 예수의 마음으로 우리는 아들이기를 원한다. 아들이어야 한다. 아들이 아니면 아버지 일에 간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루어가야 하는 기독교의 제3기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의한 본 모습으로의 기독교가 탄생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애벌레 과정의 생명체가 성충이 되고 허물을 벗어 하늘을 날거나 지상의 제왕이 되듯이 기독교의 제3기(21세기 이후)는 반드시 아들의 시대의 개화여야 한다. 스데반을 죽여 창조적 공동체를 짓밟은 초대교회가 유대교의 회당시대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시대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제 인류의 오직 하나의 성숙한 종교인 기독교는 제3의 시대 곧 아들의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때를 놓치면 안된다. 자기 때를 알아야 한다. 지금은 내 때가 아니라 하여 고향집에 머물고 있거나 뒷산 바윗돌을 부여잡고 때를 기다리던 예수의 시간이 있기도 했으나 맨 몸으로 탱크처럼 골고다를 향하여 가던 예수의 시간이 또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들의 시대 주인공으로 아들의 시대를 불러내야 한다. 더 이상의 종노릇, 노예의 종교탈을 벗기 위하여 아들이어야 한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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