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장준하 선생 추모의 밤에 함석헌 선생.

'역사의 사람'이면서 희한하리만큼 `생의 수평선'을 기리는 함석헌에게 있어 1923년 일본의 관동 대지진은 하늘이 베푼 오롯한 은혜였다. 적어도 함석헌에게는 말이다. 죽을 때까지 참을 이루기 위해 거짓과, 의를 구현하기 위해 불의와 빛을 이루기 위해 암흑과 그리고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생(生)을 수호해 내기 위한 싸움에 선택된 인격인지라 함석헌에게는 죄의 바다에서의 세례가 요구되었다.

악한 것 보다 더 악한 것, 못된 것 보다 더 못된 것, 더 악할 수 없고 더 못될 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으며 못될 수 있는가를, 얼마나 잔인·포악할 수 있는 것인가를 육골(肉骨)로 체험해야 했다. 함석헌이 체험한 그 범죄의 원인자가 곧 국가주의라는 것이었다.

1923년 9월 1일∼2일 사이에 체험한 이 사건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숨질 때까지 놓을 수도 놓일 수도 없는 적을 만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1923년, 이 관동대진제가 하늘이 함석헌에게 베푼 오롯한 은혜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갑론을박이 필요없는 은혜중의 은혜였다.

'생'이란 절대의 뜻을 이루어가는 싸움을 말한다. 싸움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뭐냐? 적의 정체, 적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함석헌을 은혜입은 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가 이후 여생을 싸움할 적의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에서 하는 말이다. `국가·국가주의'라는 대적 말이다.

스물세살 청년의 나이로 국가라는 것, 국가주의라는 것을 자신이 싸워야 할 싸움의 대적으로 발견, 규정한 함석헌은 1989년 2월 4일 오전 5시 25분. 그가 숨지던 순간까지 90연륜에 이르도록 점점 더욱 가열찬 싸움을 싸워냈고, 드디어는 역사의 궁극적 실제로 씨알(民衆)을 섬겨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동경에서 함석헌이 당해냈던 관동대진제를 사실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함석헌이 관동대진제 중 어떻게 해서 `국가·국가주의'를 그의 생사를 가늠하는 일생의 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는가?를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신전구탕도(神田區湯島)

함석헌이 일본 유학을 위해 처음 자리잡은 곳은 신전구(神田區) 탕도(湯島)의 한 하숙이었는데, 오산의 창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둘째아들 이택호(李宅鎬)의 주선이 있어서였다. 당시 함석헌의 집은 시골살림으로는 비교적 탄탄한 편이었으나 동경유학까지 미치지는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함석헌에게 오산학교로부터 유학자금 지원이라는 낭보가 전해졌고, 바로 이어 동경에 늦나이에 유학중이던 이택호의 주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택호가 함석헌을 탕도에 자리잡도록 안내한 것은 이 탕도가 속한 신전구에 대학 진학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는 정측학교(正則學校)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산학교는 아직도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학교여서 함석헌은 그 자격을 취득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이곳 탕도는 함석헌의 인생에 새 살표(→)를 그려준 그의 족형(族兄) 함석은 (咸錫殷·숭실학교 교사·육촌형)이 일본에 유학, 명치대학을 다니면서 하숙을 했던 곳으로 석헌을 정말 크게 아끼고 기렸던 그가 일본 유학생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여러차례 언급한 지명이어서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는 터였다.

함석헌은 이 신전구 탕도에 있으면서 검정고시 준비학교인 정칙학교에 입학하여 특히 영어수업에 전력을 쏟았다. 후에 만인의 인정을 받게 되는 그의 영어실력은 이때부터 닦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함석헌은 동경지리와 사람들의 낯도 어느정도 익히게 되면서 탕도를 떠나게 된다.


본경구 효정(本卿區 肴町)


정측학교에서는 조금은 더 멀어지는 지역이었지만 진학준비를 위한 학업에는 별 지장을 받지 않을만한 곳인 본경구(本卿區) 효정(肴町)이라는 곳으로 하숙을 옮겨가게 된다. 함석헌이 그의 하숙을 신전구 탕도에서 본경구 효정으로 옮긴 것은 환경이나 형편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옮겨가게 되는 하숙은 아버지의 연배가 되는 어른들이 있는 곳이었다.

오산의 동창인 명재억(明在億)이 그의 삼촌 명희조(明羲朝)와 또 한 사람 저 유명한 채필근(菜弼近) 목사가 같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 50이 가까운 나이에 동경제국 대학생으로 늦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대 그 어른들과 함께 하숙을 하겠다고 옮겨간 것이다.

이 사건은 함석헌의 `사람됨'을 말해준다. 그 큰 어른들 가운데서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어른들께 온갖 시중을 각오하지 않고는 어른들과 섞일 수는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함석헌의 탕도에서 효정으로의 하숙 바꾸기는 “더 큰 어른들에게서 더 배우겠다”는 한생각 때문이었다. 이때가 8월초 쯤이었다. 그런데 명재억을 통해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지만 어쨌던 친척이 되는 `덕일(咸德一)이가 지금 탕도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눈물이 핑 돌았다. “덕일이, 덕일이가!” 했다. 만감이 교차한다. 평고시절, 그 3·1 만세운동, 퇴학후 2년 동안의 그 영락없는 짚시생활, 방향없이 내달리며 가슴치며 울며살던….


평양 경창리 5번지 덕일네집


함석헌은 경창리 5번지였던 그 덕일네 집을 잊지 못한다. 이 덕일네 집은 그 3·1운동을 치루어낸 곳이었다. 당시 청년지휘의 책임자였던 함석은 형의 명령을 따라 평고 대표들을 모아 운동의 방법·방향을 의논한 곳이 그곳이었고, 숭실전문 지하실에서 배당받은 독립선언서를 가져다가 숨겨두었던 곳, 그리고 평소 예술적인 소양이 있어 하루 주야 온날 반듯하게 태극기 목판을 새겨 밤을 새며 수도없이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찍어낸 곳도 그 경창리 5번지 덕일네 집이었다.

덕일네는 일찍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홀로된 어머니가 하숙을 쳐서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 경창리 5번지 덕일네집이 함석헌이 평고 3년간 먹고자며 하숙하던 집이었다. 덕일이 아래로 순일이가 있었는데 석헌 보다는 세살, 다섯살 아래였다. 덕일이와 순일이는 석헌을 친형처럼 따르며 좋아라 했다.

그 경창리 5번지 꿈의 집을 떠난 지 5년이 되었는데, 그 “덕일이가 지금 탕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오늘 9월 1일, 함석헌은 그 덕일이를 만나러 탕도엘 간다. 그래, 그 덕일이를 만나러 말이다. 함석헌은 아침일찍 하숙을 나섰다. 길 가는 도중 내내 경창리 5번지 덕일네집을 그려보면서 간다. “덕일네집 내가 쓰던 하숙방 천정에 숨겨둔 태극기 목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며 깊은 얼숨을 내쉰다.

3·1 만세소리가 다시 살아 온몸을 뒤흔든다. “덕일아!.” 함석헉은 덕일을 가슴 가득히 않았다. “덕일아…!.” 둘은 서로 움켜 않은 채 어쩔줄을 몰랐다. 평소 말 없고 조용하기만 하던 석헌이 덕일을 만나선 전혀 딴 사람이었다. 시대정신이 다시 두 젊은이를 덮어온 것이다.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함석헌의 가슴속에 한(恨)으로 굳은 이야기들, 함석헌의 한을 너무 잘알고 있는 덕일이가 더할수 없이 고맙고 기뻤다. 하늘아래 친구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지체없이 “덕일아!” 할 것이었다. 석헌은 석헌대로, 덕일이는 덕일이대로 만세 부르고 헤어진 이후 5년 만에, 5년 동안의 이야기가 그칠줄을 몰랐다. 오전 일찍 만나 정오가 다 되도록 이렇게 석헌과 덕일은 역사의 상처, 영광의 상흔(傷痕)을 노래(?)하고 있었다.


지진이다!


정말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석헌이 시계를 꺼내보며 일어서니 덕일이가 두 손으로 석헌을 붙잡으며 안된다는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을 먹고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밥이 충분히 있으니 국만 좀 덥히면 된다며 굳이 자리에 앉으란다. 그래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우루르 진동이 오는가 했더니 “지진이다!”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온 집이 흔들린다. 멈추는가 하면 다시 우르릉, 멈추는가 하면 또다시 우르릉, 갑자기 “뛰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번개처럼 석헌의 뇌리를 스쳤다.

석헌은 덕일이를 끌고 2층 계단을 내려 현관을 나오자마자 기왓장이 비오듯 쏟아지며 집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진정되지 않는 가슴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이건 도저히 사람세상이라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숨을 쉴 만 하면 또 흔들리고 숨을 쉴 만 하면 또 천지가 흔들리고, 모두가 겁을 먹은채 오도가도 못한다. 사람마다 빈자리로 피하며 두 손 싹싹 비비면서 “오 가이사마, 오 가이사마”를 부르짖는다. 하나님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동경 전시가 불바다가 되어간다. 심한 진동이 시작된 때가 정오였다. 집집마다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초강의 지진이 일자 쓰던 부엌 불들을  미처 끌 생각을 못하고 그대로 두어둔 채 집들을 빠져나온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 불들이 지진과 함께 동경전시를 그대로 불바다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불인지(不忍池)


그런데 혼란을 또 하나 더한 것은 지진으로 대부분의 수도관들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불길을 잡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석헌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거의 못하고 있었다. 못했던 건지, 않했던 건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을옆에 있는 불인지(不忍池)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불인지는 상야공원(上野公園) 안에 있는 깊지는 않으나 꽤 넓은 못으로 주변에는 아름다운 잔디밭이 둘려있었는데, 지진과 불길에 몰린 사람들이 발디딜 틈 없이 그 불인지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정말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될대로 되라” 할 수 밖에 없게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될대로 되라는 소리도 어렵게 된 것은 신전구 중심에서 솟아퍼지던 불길이 여기 상야공원으로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 불길이 불인지 못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로부터 2∼3백미터 정도를 남긴곳까지 불어닥쳐왔다. 그런데 떼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바로 그때 물자동차 두대가 와서 불길쪽을 향해 물을 거세게 뿌리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후에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에게는 몰라도 내게는 참 신기합니다. 모든 것이 꼭 짜인 각본 대로만 된 것 같습니다. 거기 몰렸던 사람이 몇만명인지 모르나 그 사람들이 살아난 것은 소방펌프의 힘 때문이요, 그 사람들이 산것은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요, 나를 살려둔 것은 증거할 것이 있어서 하신 것 같이만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말 함석헌을 포함한 그 많은 사람들을 살린 것은 소방펌프가 아니라 바람이었다. 지금까지 바람이 신전구 중심에서 이곳 탕도쪽으로 불어와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지면서부터 정말 희한하게도 누가 명령이나 한 것처럼 바람이 반대로 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과학적 진리를 확신하는 석헌으로서도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한동안 멍한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반대로 불어가고, 불길이 어느 정도 잡히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석헌은 자신의 하숙집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석헌이 덕일이와 그 동생 순일이 그리고 일본친구 강두(江頭)를 데리고 자기 하숙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새벽 닭이 울 때 쯤이었다.

함석헌의 하숙집은 다행이랄까 무사했다. 그 무서운 밤이 가고 날이 밝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밖에서 “잡아라, 죽여라, 한놈도 남기지 마라”는 떼거지로 하는 고함소리가 잇따라 들려온다. 퉁, 퉁, 퉁 건장한 사나이들의 내달리는 발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된다.

석헌은 적잖이 불안했다. 그 고함소리들이 지진과는 무관한 소리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함석헌은 그 실상과 부딪히게 된다. 국가·국가주의라는 괴물과 말이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