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종놈의 종교로 회귀해 버린 이후 교회들은 예수의 무덤이 되어 다시 한 번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종교가 아니라 하셨거늘 성전에서 회초리를 드셨을 때 보지 못했는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안에 일으키리라'하신 말씀 듣지도 못했던가. 이 말씀 듣지 못하기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인가. 아들을 부르라. 종이 아니다. 모세는 사환이고 예수는 아들이라 하시는 이의 말씀을 이제는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던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다시 바칠 수 있었기에 믿음의 아비라는 호칭과 명예를 지금도 누리고 있다. 아브라함을 보라. 그가 75세라는 늙은 나이에 문명의 첨단 지대인 수메르를 떠나 가시밭길이나 진배없는 가나안으로 가서 그가 100세에 이삭을 얻기까지 25년 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시련 속에 살던가.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자기 모습을 다시 정돈해야 한다. 무슨 종교라면서 그렇게도 탐욕을 피하지 못하고 그 수렁에 빠져서 그 노릇인가. 무지하기는 또 얼마인가? 종의 종교라고 욕을 해도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그들, 그래서 평토장한 무덤 같은 너희여! 뱉어내듯이 쏘아붙이며 꾸짖던 날에도 눈만 꿈벅 꿈벅 했던 유대인들 아니던가. 종의 종교를 내던져 버려라. 더 이상 그 노릇은 사양해야 한다.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형성되었던 예루살렘의 거룩한 공동체를 알고 있다. 그때 거기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고 사도들 발 앞에 가지고 왔었다 했지, 그때의 모습에서 공산당 운동가들이 어떤 힌트를 얻었다지 않던가. 또 원시 공산시대를 사도행전 초기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포근한 말로 예루살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공동체 등의 이름으로 초기 예루살렘을 회상한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키 위해 일곱 집사를 세웠던 일도 사울과 그 일파들의 폭력 앞에서 스데반이 희생(순교) 하면서 역사는 정지하고 말았다. 이후 기독교는 바울, 그리고 베드로가 바울의 회당종교에 동참하면서 유대교의 변형 수준에 머물게 되었으며,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 또한 더는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을 함께 하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와 생활의 이분화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모든 날들을 아들의 날로 또는 아버지의 날, 더 분명하게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모든 성도의 날들로 삼을 수 있어야만 아들의 시대가 가능하며 생활공동체 공간 모두가 신앙과 생활의 터전이 되는 날들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제도나 형식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의 수준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숙한 인간의 모습, 다시 말하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삶을 통해서 예수의 인생을 자기 온 몸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신앙 능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생활을 보라. 언제까지 안식일이나 주일을 찾아서 헤매는 과정의 신자 노릇을 하려는가. 그것들을 차라리 팽개치고 특별한 날이 별도로 없는 삶을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해 보자. 스데반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를 보라. 또 스데반의 설교에 나타난 히브리 사상과 예수 메시아의 이해가 얼마나 분명한가를 확인해 보라. 기독교가 균형을 유지하려면 스데반이 살아 있어야 했다. 스데반을 지킬 수 없었으면 그 대신자라도 나와야 했고, 지금이라도 스데반이 점유하고 있던 정신의 자리를 긍정하면서 초대 공동체를 상상해 보라. 교회가 재산이 아님은 물론 세력도 아니다. 오늘의 교회는 마치 이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군대나 되는 듯이 전의를 불태우거나 세상에 대해 적의를 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기독교의 적이 아니며 싸움의 대상도 아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또 저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고 빚을 갚아 주며 아픔을 치유해 주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의 종교에게 있는 것이다. 기독교여 더 이상 종노릇을 그만 둘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다. 종이 무엇이며 또 주인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하고 무슨 논의를 더 하겠는가고 낙심하지 않을 터이니 일어나 나아오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예수를 다시 바라보고 또 그가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자.  이땅의 문명은 더 이상 재래의 종교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분명 새종교, 종교 아닌 종교, 종교의 기득권을 버린 예수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기까지 더 이상 이 세상에게는 필요치 않는 것으로 자기 만족과 자기 흥분에 빠진 옛시대의 종교임을 깨닫고 돌이켜야 할 것이다.(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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