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현장에 책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21세기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과 의미를 기독교는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쯤은 재림시대의 적기가 아날까. 하지만 그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부정적인 징조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대의 징조는 부정과 긍정 모두의 방식이어야 한다.  긍정의 조건들은 그래도 교회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는 본디 그리스도 예수의 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것이 이유가 되어 교회들이 스스로의 위치를 낮추어 하급 종교들의 모습이 되었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 그 외형체의 모두가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공동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회당 전승에 매달려 몸짓을 바꾸지 못했던 4세기 초 무렵부터 기독교는 변질·변형 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용기를 내야 한다.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곧이어 오순절 교회 탄생과 함께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긴 세월 3백여 년 수난기를 거치면서 생명력을 지켰으나 정작 자유로운 몸이 되자 교회는 자기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난 5년여 동안 필자는 혼자서 21세기 대망기를 써오면서 공론의 장을 만들고자 무척 애를 썼다. 이제 우리는 이 지면을 뜻이 있는 이들이 나누어 책임지는 것으로 하자. 숨은 생각을 드러내 보자. 우리의 전시대를 너무 탓하지만 말고, 이제부터가 출발점이라고 하자. 다시 오시는 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할 것들은 우리가 만들어 내자. 주 하나님 뜻을 배반하는 징조들과 함께 그 분이 신뢰할 터전을 우리가 만들어 내자. 필자의 수고를 `강태공의 낚시질'이었다고 하자. 강태공은 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던진 낚시대의 낚시바늘이 고기가 물 수 없는 곧은 낚시 였다고 한다. 지난 5년간 21세기 노래를 불렀던 필자는 이제 노래가 아닌 행동의 시간들이어야 한다. 세월을 낚는다하여 방심했다거나 사치한 것이 아니었고 기도와 모색의 시간이었다. 노래하며 행동하리라. 함께 부를 동무들을 찾는다. 다음 주부터는 필진을 찾겠다. 뜻이 있는 이들이 21세기 대안을 함께 만들며 가꾸어 가자.  우리는 더 이상 역사의 날들을 탓하고만 있을 수 없다. 지난날의 교회사를 수치스럽다고 하는 수준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과연 새로운 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는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우리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탓하기에는 우리가 지닌 시대의 조건은 너무나 양호하다. 한국교회의 경우 성장이 멈췄다고는 하지만 교회에 주 예수의 생명이 있는 한 성장하는 것이고 또 외형상 둔화라고 해도 내면의 성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1천여 만명에 해당하는 기독교 인력이요 수만교회의 이름이면 우리는 얼마든지 크게 몸을 일으켜 볼 수 있다. 모두 다가 아니어도 좋다. 기드온 용사를 부를 때 3만 2천명의 지원자들 중에서 3백명을 선택 하신 하나님의 숨은 뜻을 생각해 보자.  각기 집으로 돌려보낸 다수와 3백명 전쟁터 용사가 된 자들이 도덕이나 신앙의 우열을 말하기 보다는 각기의 선택으로 보자. 그러나 우리는 3백의 기드온 용사가 되고 싶다. 엘리야 수준의 7천도 그립다 하자. 서로를 지키고,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일으켜 내기 위하여 서로를 붙들어 주자. 3백명 기드온 용사가 국난을 해결하고 민족의 나갈 터전을 넓혔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는 우선 3백명 찾기를 서두르기로 하자. 서로를 위하여 구체적 대안을 찾아보자. 교회의 성장, 교회의 강화, 교회개척의 방법론, 교회와 사회의 관계, 교회와 타종교 등 구체적인 발언대가 되는 지면이 되기를 기대하며 널리 뜻 있는 이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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