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2장에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온갖 열매를 맺고, 저주가 없고, 다시 밤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과 어린양을 곁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기록한다.  거기에서 성령과 신부가 사람들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듣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가 와서 생명수를 값없이 받을 것이란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고 싶어한다. 나도 그렇다. 이것은 현실세계인가, 저 멀리 있는 피안의 세계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현실세계로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아비규환이요 아귀다툼이 일상생활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바라고, 가능성이 없다면 희망마저도 버려야 할 것인가?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성으로 판단하여 가능성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바랄 때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믿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모임을 통하여 할 일은 그 믿음을 현실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21세기라고 하여 교회의 모습이 20세기나 그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항상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역시 초대교회다. 교회로서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공동체의 형태를 띤 그 모습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나 깨나 떠나신 님을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그 때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그려야 할 그림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우리는 세상의 논리가 아닌, 교회의 자체논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삶의 핵심에, 중심에 그 님의 진리를 두는 일이다. 교회는 거대조직의 논리를 떠나서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들의 관계논리로 재편성되어야 한다. 지배와 권력행사를 일상으로 하는 정치논리를 떠나고, 자본주의의 유물주의(물질중심과 물질숭배)를 떠나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교회의 형태가 작아야 한다. 몇 천명, 몇 만 명이 모이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조직에 불과하다. 그러한 거대조직 속에는 분명히 조직관리와 조직정치가 진리실현을 흐리게 하는, 주인과 손님이 완전히 뒤바뀐 잘못된 상태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조직 속에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위계질서뿐이다. 교회가 거대하게 되는 것은 목회자나 교회관계자들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진리실현을 바라는 그 님의 뜻인지는 찬찬히 따져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한 거대조직 속에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 익명으로 끼어 살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제각각 제소리를 내면서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대한 교회들은 작은 생명공동체로 전환하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며, 큰 교회를 꿈꾸는 작은 교회들은 있는 그대로를 생명공동체로 자리를 매길 노력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는 교회와 교회 밖을 구별하는 담을 헐어야 한다. 분명히 인터넷세계가 더욱 확장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면 거대한 모임은 별로 매력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대신 작은 생명들의 만남을 그리워할 것이다. 거기에는 믿음과 믿지 않음이 구별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교회들은 일반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길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나 목회자의 수준으로 평신도를 성장시켜야 한단 말이다.  신도와 하나님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능력을 평신도에게 길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신학대학교 제도를 성직자나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에서 일반 평신도를 교육하는 기관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직자는 성직자회의에서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 모임 단위에서 가장 깊이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들로 선정하되 자주 따지고 물어야 한다. 이미 직업화한 성직을 돌려주어야 한다. 모든 신도를 성직자로 기르고, 모든 성직자는 평신도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갖추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자기가 서 있는 곳과 진리실현의 장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교회는 지나치게 교회중심의 고립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약간 담을 헌다는 것이 교회주변에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도다. 이것이 아니라, 교회의 담을 헐어서 지역과 하나가 되게 하는 훈련과 프로그램이 나와야 한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일,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앙과 생활이 격리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 따져서 생활신앙이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새 예루살렘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내가 있는 그곳을 새 땅과 새 하늘로 여기고 살아야한다.한남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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