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3·1운동 55주 기념강연회 함석헌 선생 강연 모습.

함석헌, 동경고등사범에 진학하다


그 무서운 관동대지진을 겪은 함석헌은 다음해 1924년 동경고등사범 문과에 합격하게 된다. “한해를 준비해 가지고 명년에는 꼭 어디나 입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도 놓지 못하고 지냈다”는 그 한해를 넘어 대학을 진학하게 된 것이다.

스물네살이 되는 해였다. 제대로였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도 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럴수 없었던 것이 함석헌만이 입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깊은 학문을 대하기 전 하나님은 함석헌으로 알찬 씨알로서의 인격이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주신 것이 갖가지 고난이었다. 함석헌은 동경고사에 합격하기까지의 교육과정(학교생활)을 이렇게 술회한다.

“내 학교가 늦은데는 역사의 작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시대에 나서 소학교에 다니다가 합병 후 다시 공립보통학교를 다녀서 졸업을 했고, 그 다음 중학교육은 먼저 관립학교(평양고등보통학교·필자 주)에 들어가서 받다가 3·1운동때 버리고 나와서는 `울분과 우수의 2년을 보내고' 다시 오산(사립·필자주)을 다녀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고나니 늦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늦은 것은 부끄럽지만 생각을 좀 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요, 더군다나 소학·중학을 다 사립·관립을 겸해 다녀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도매금으로 한데 묶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학에는 자유정신이 있고, 관학에는 벼슬아치 버릇이 붙기 쉽습니다. 다른 나라는 또 몰라도 우리나라는 그렇습니다. 나도 만일 양시(楊市)고등보통학교에서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로만 올라가 거기서 마쳤더라면 대통령 보좌관쯤이나 되고 말았을런지 모릅니다.

다행히 시골 상놈의 집에 나서 사립 덕일소학교 물 먹고 사립 오산중학교 물 먹었기 때문에 벼슬은 못했어도 얼반둥이 일본 사람됐던 일 없고, 남에게 종살이 아첨질 가르쳐준 일 없습니다.”

말로 할 수 없으리만큼 아프고 슬펐던 그 어린 소년기에서 왕성한 청년기까지의 외부로부터의 압박을 지금 함석헌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함석헌에겐 축복의 세월이었다. 현실적으로 함석헌의 그것은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아프고 억울한 날들이었지만 그 세월이 역으로 함석헌에게 더할 수 없는 축복의 세월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고난의 세월이 있어 동경고사진학 이전 이미 전신을 내던져 싸워가야 할 타깃(Target)을 확정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함석헌의 이제부터의 싸움


함석헌이 이제부터 전신을 던져 싸워야 할 것이란 이것, 곧 반관(反官), 반국가주의(反國家主義)라는 것을 말한다. 이 함석헌의 영원한 투쟁의 주제인 반관·반국가주의는 아주 자연스럽게 민(民)주(主)와 세계 국가주의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의 함석헌에게 이와 같은 반관·반국가주의와 이를 대처하는 민(民=人)과 세계주의라는 것이 학술적으로 체계화 되었을리는 물론 없었고, 또 그가 쌍놈, 민중을 씨알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그 씨알을 안고 숨질 때까지도 논리화·학술화 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살러 왔고, 이루러 왔지 설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말이다.

어쨌던 이제 함석헌은 학문의 바다에서 헤엄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헤엄의 틀이 이제까지의 헤엄과는 전혀 다른 그만의 형(形)이었다. 스스로 짓고 쓰는 한편의 시, 스스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 어떤 스승의 교훈 한마디, 글 읽기, 글 쓰기, 뉘게서 얻어듣는 일화들, 심지어는 어떤 고전은 물론 영어니 일어니 헬라어니 하는 언어들까지도 그것이 함석헌에게 올때에는 특별한 용도로 오는 것이었다.

관을 견제하고 민(民)을 키우는, 국가주의를 격탄(激歎)하고 세계주의를 키우는 자양소로서 말이다. 해서 함석헌에게 있어 학(學)은 그야말로 업(業)이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기쁨의 업이었다. 이미 민(民)이 그의 자신이요, 세계가 그의 나라가 된 터에 일본이 유달리 밉지도, 조선이 유달리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읽고 쓰고 듣기에,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에 전력·전심·전시간을 바쳐갈 뿐이었다. 동경고사는 선생이 되겠다는 이들로는 일본 천지의 수제들이 모인 곳이었다. 함석헌 자신이 후에 쓴 그의 자서전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할 때 그토록 멸시받는 조선학생으로 전교 수석을 했다. 이때쯤 그는 이미 유영모·우찌무라를 벗어나고 있었다.

참 민(民)은 자주한다.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자라간다. 함석헌은 민의 선구자라기 보다 민(民) 자체였다 함이 옳다. 그는 나서 죽을때까지 민(民), 영원한 민(民)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의 민(民)은 국가의 민, 곧 국민(國民)은 아니었다.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民)이었다.

국민이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인민(人民)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후에 그에 의해서 창도(創道)되는 `씨알사상'의 그 씨알은 결코 국민이 아닌 정확하게 인민을 뜻한다. 그의 씨알이란 그저 사람으로서의 사람, 맨 사람을 뜻하는 것이니….

동경고사에 입학한 함석헌은 드디어 역사의 공인으로서 스스로와의 씨름을 시작한다. 이제는 나라를 구해내는 일에 투신해야 할 것인데 사회주의운동으로 할 것이냐? 기독교 신앙으로 할 것이냐? 사회주의조선이냐? `성서조선'이냐? 비록 이제 대학을 갓 시작하는 함석헌이었지만 이미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얻기 위해 생각을 하고 생각을 깊이 해 더 크고 깊은 생각을 얻는다.

무엇으로 나라를 구할 것인가?


대학을 준비하는 동안 그 역시 보다 큰일이 없었지만 합격한 후의 대학은 함석헌에게는 생각을 캐내는 불 도가니였다. 함석헌에게 있어 동경사범은 선생이 되는 코스가 아니었다. 석·박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에게 번민이 일기 시작한다. 나라를 구해야 한다. 무엇으로 나라를 구할 것이냐 하는 번민이었다. 대학진학 준비를 하던 1923년 관동대지진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국가주의 반인도적인 범행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종교라는 것, 도덕이라는 것의 실상을 투시해버린 석헌에게 그래도 남은 것은 사회주의운동 아닐까 했다.

석헌이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은 학교 밖에서거나 안에서거나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공존의 모습'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그렇듯 격심하게 조선인을 사람 아닌 것들로 차별하는 때에,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은 의심스러울 만큼 달랐다. 민족적인 차별이 전혀 없는듯 했다.

실제로 제국인 일본인이 피지배국인 조선인을 지켜주며 동지노릇을 하는 것을 지켜본 석헌은 `사회주의 혁명 이외에는 길이 없는 것으로'(전집 4권 215쪽)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문제를 간파(看破)하기 시작한다. 도덕이며 인도주의, 정신적 가치들을 전혀 무시해 버리는 것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자신을 사회주의로 끌어드이려는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쇼시얼리즘'(Socialism)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것은 R. 오언(Robert Owen 영국·1771∼1858)의 학파들이었는데 R. 오언의 원사회주의가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함석헌에 의해 확인되어지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랬다.


함석헌의 번민과 '내 친구' 김교신


나라에 대한 함석헌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고, 이렇듯 고민하는 사이에 함석헌은 그 후 `내 친구'라고 일컫는 김교신을 만나게 된다. 함석헌의 자서전에는 김교신을 만난 것이 1924년 가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 이미 김교신은 동경고사의 1년 선배로 먼저 재학중이었으니 함석헌의 자서전에 나타나는 대로 함석헌이 김교신을 만난 것은 그가 동경고사에 입학한지 거의 1년 반쯤 후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제로 함석헌이 김교신을 통성명 하게 된 것은 입학하고 바로였을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전 해에 있었던 관동대지진으로 죽은 조선학생들을 1924년 새학기가 열리면서 바로 학생회 중심으로 조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전집 4권 261쪽 참조)을 통해서이다. 그 조사는 개인들이 그저 합심해서 정도로 벌인 것이 아니었다.

유학생회에서 조사단을 조직해서 조직적으로 시행한 것이었다. 이때 이미 함석헌과 김교신의 만남에 이어 깊은 교우가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동경고사에는 약 50여 명의 유학생이 있었는데, 유학생회가 있어 연중 몇 차례씩의 정기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유다른 책임감의 두 학우의 만남이 있었을 것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하겠다.

그럼에도 함석헌의 자서전에 김교신을 만났다는 사실이 1년 반이 지나 나타나는  것은 특이한 양인의 삶의 자세에 기인했다고 보여진다. 특이한 양인의 삶의 자세란 이미 지고한 서원(誓願)을 품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누군가 김교신을 가리켜 `칼'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이 꼭 같이 그랬다. 그래서 두 사람에겐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같은 삶의 자세가 개인적인 만남을 어럽게 했고, 마치 함석헌이 김교신을 처음 만난 것이 1924년 가을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어서면 또 다른 자신들의 공적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아무 스스럼 없이 돌아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들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계에 있던 함석헌이 1925년 가을 김교신을 통해 저 유명한 우찌무라 간죠를 만나게 된다. 〈내촌감삼(內忖鑑三)〉 말이다. 그러니까 1925년 가을은 함석헌이 김교신을 만나는 때가 아닌 김교신을 통해서 내촌을 알게 되는 때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때도 역시 유학생들 모임을 통해서였다.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서 일본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몇마디 오가게 되었는데 김교신이 무슨 말끝에 “우찌무라 선생이 계시니까…” 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우찌무라 얘기에 적잖이 놀랐다. 놀란 것은 아직도 자신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이름이어서였다.

벌써 4∼5년 전쯤의 일이다. 함석헌이 그의 평생에 `선생님'이라 불렀던 유영모(당시 오산고보 교장)로 부터 들은바 있던 이야기 중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내촌의 일화가 두고두고 함석헌 안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김 형. 내촌이 아직 살아있는 분이요?”

함석헌의 가슴이 이상스러히 두근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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