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말씀 모임〉에서 함석헌 선생.

아버지 전도 일념으로 성경 소리내 읽어… 장로돼
자신 안에서 찾고 또 찾고, 내촌 통해 새신앙 얻어

함석헌은 아홉살에 교회 학습을 받았다. 12살이라야 받을 수 있는 학습을 9살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할 뿐만 아니라 '참 잘믿는 아이'로 교회의 어른들로부터 한결같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례'는 부모님들이 다 믿어야만 받을 수 있다는 교회법 때문에 끝내 받지 못하고 말았지만 열여섯살 까지는 정말 철저한 '교회신앙' 속에 자랐다.

“내가 만일 인도에서 나서 힌두교에 입회하였더라면 힌두교인이 됐을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국에서 나서 16세까지 자라면서 배워온 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후 여러가지로 참을 알려고 공부해 왔으나 예수처럼 진실을 말하시고 실천한 분은 없더라”라고 스스로 말한바와 같이(나의 스승 함석헌, 해동문화사, 1991, p.22) 함석헌은 아주 열심있고 흠없는 교회아이로 자랐다.

4∼5살부터 글 공부를 시작해 책 읽기를 몹시 즐겼고, 특히 성경읽기는 주위의 믿는 어른들이 놀랄 정도로 했다. 아버지와 함께 한방에 있을때는 아버지를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에 성경을 읽기도 하고, 성경중에 제일 무섭다고 생각되는 요한계시록의 지옥에 유황불과 황충이 있다는 대목을 들으라하고 큰 소리로 읽곤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어느날은 당신은 아니믿으면서도 아들 석헌에게는 '믿는 것이 좋다' 하시면서 국한문 신구약 성경책을 사오셔서 표지를 창지로 몇겹이나 두텁게 바른다음 연두색선을 곱게 둘러 주시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 없으신 사랑을 아들 석헌의 열심이 더욱 뜨겁게 불러냈던 것이다.

후에 아버지는 믿어 장로가 되었고 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앙교육과 사회생활 교육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있는, 신실한 믿음으로 자란 함석헌이 이제 고민을 시작한다. 사회주의 조선이냐? 성서조선이냐? 하는 고민이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렇듯 정통적인 교회에서 예수의 아이로 자라온 석헌이었지만 신앙(기독교)으로 나라를 구하자는 결단을 쉬할 수 없었던 것은 소위 기독교권(圈)에 그의 이목을 끄는 인물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수 없었던 것은 실제로 지금 목전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권 일본인들의 조선이들에 대한 각별한 보살핌 때문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가 공존이라는 인생관이나 철학의 결과로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해도 말이다. 함석헌의 가슴에 이상스럽다 하리만큼 어린 나이때부터 '세계국가주의'가 자라고 있었고 오산학교 재학중 웰스(Herbest Geage Wells, 1866∼1946)를 만남으로 그의 이전까지의 (기독교)신앙이 크게 비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먼훗날의 일이지만 그가 내촌과 유영모를 떠나게(?) 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세계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유영모는 함석헌이 말하는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함석헌에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한 첫 사람이면서 마지막 사람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씨'를 유영모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이라 한다. “선생님을 통해서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습니다”(내가 아는 우찌무라·간조선생·우찌무라 전집 월보 제39권 1983·12, 일본 이와나미社).

그러나 함석헌에게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세게 일어나는 '사회문제'였다. 그 가슴의 '참'은 유영모의 전도(傳道)로 받아 품은 것임이 분명하지만 함석헌 안에서의 그 참은 '역사와 세게'·'사회'라는 '현장, 현실속에서의 실현'으로 승화한다. 결코 개인적인 도덕과 윤리, 성결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선생님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였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문제(전체의 문제·필자 주)가 차차 머리를 들기 시작했습니다”한 것은 그래서이다.

게다가 “성서로 나라를 건질 수 있다”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위 지사요, 투사라고 알려져 있던 사람들의 총독부와의 타협, 변질이었다. 이것이 함석헌으로 하여금 기독교냐? 사회주의냐? 사회주의 조선이냐? 성서조선이냐?로 정신적·역사적 진통을 거듭하게 했던 것이다.


성서(聖書)를 품고 사회주의를 넘다


그 고뇌하는 청년 함석헌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온다. '내 친구' 김교신을 통하여 내촌을, 내촌을 통하여 저 눈물로 위대한 역사적 삶을 살고간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만난 것이다. 함석헌은 내촌을 통해서 예레미야를,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촌을 만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내촌과의 만남을 통해 성서관의 일신(一新)을 체험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후에 함석헌이 그를 말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로부터 '종교인'이라 불려지게 되는 초석이 놓여진다.  내촌에게 새신앙, 새성서관이 있어 함석헌에게 전해준 것인지 내촌의 성서관 신앙관을 함석헌이 새신앙, 새성서관으로 체험해 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 둘이 함석헌 안에서 용해(鎔解)된 것인지 뭐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김교신을 통한 함석헌의 내촌과의 만남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촌을 말하는 사람들 중 '내촌의 문제는 지나친 애국자라 것'이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기까지 하는터에 함석헌이라서 이같은 사실을 몰랐을리 없었겠는데, 또 함석헌 스스로의 내촌에 대한 언급에도 “한국인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중에도 우찌무라 선생에 대한 오해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 너무 일본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찌무라 선생의 강한 애국심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씨알마당, 1995·10. 내가 아는 우찌무라 간조선생, p.49). ”라고 하는터에, 그같은 일본의 애국자 내촌을 만난 함석헌이, 그 역시 그의 나라 조선에 대한 애국심에 내촌의 일본 사랑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지않을 터에, 함석헌은 내촌과의 만남을 감히 대놓고 이렇게 단언한다.

“나는 이따끔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라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를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함석헌은 이제 더이상 방황할 일이 전혀 없게 되었다. 내촌을 통해 얻은 새신앙, 새성서관 때문이었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을 것이다.

하는 확신! 이 확신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그의 역사의 진로에 환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사회주의를 그가 버렸다기 보다 그가 내촌을 통해 발견한 '신앙'과 '성서'가 함석헌의 관심사의 하나였던 '사회주의'를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함석헌의 과제 '성서조선'


성서조선! 이제 성서조선은 함석헌의 죽을때 까지의 과제가 되었다. 죽기로 성서를 사랑하기로, 죽기로 조선을 사랑하기로. 아울러 동경고사 재학중인 조선학생으로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단어를 키워드(Key ward)로 하는 동우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데, 우선 함석헌이 '내친구'라고 말하는 김교신과 노평구,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그래서 6인의 동인이었다.

이 6인 동우회의 살림을 맡아보는 이는 범사에 철저함의 본이었던 김교신이었고, 함석헌은 어떤 '일' 보다는 '생각'을 깊이 하는 편이었다.

특히 '무엇이 참인가?'를 묻고 또 묻고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일반적으로 이해, 통용되는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었다. 무조건 믿을 것을 요구하는 소위 정통적인 교회의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그 (자신)안에서 찾는 이었고, 찾을때까지 찾는 이었다. 이같은 그의 '성서와의 삶'이 후에 그가 독선적이니 이단이니 하는 비난을 받게 했지만 동시에 1947년 북한 공산당 정권을 탈출, 남하한 직후 부터 한국기독교 초유의 교회밖에서의 '말씀모임'이라는 것을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끌어가게 한 것이다.

함석헌은 이렇듯 김교신→내촌→성서의 재발견을 체험하면서 성서신앙에 굳게 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을 성서위에 세운다는, 성서신앙으로 조선을 구원한다는 성서인생을 시작한다. 성서를 더욱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더욱 간절해지면서 함석헌과 성서조선 그 동우회원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이 동경고사를 마치게 되는 것이 1928년 봄이었는데 1923년 대학진학을 위한 예비학교 1년을 포함해, 만 5년사이 '큰 학자'로 불리워지리 만큼 영어, 수학, 물리, 역사, 박물거의 전 영역에 걸쳐 그는 놀라운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듯 맘조리던 대학을 마친 함석헌은 자신을 여기까지 길러준 오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꿈의 도장 오산을 떠난지 다섯해. 떠날때는 그저 오산학교의 갖졸업생으로 왔지만 이제 돌아가는 함석헌은 오산과 명운을 함께 할 교사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산으로 돌아가는 함석헌에게는 하늘을 향한 자신만의 약속이 있었다.

“오산과의 일생을 함께 한다”는 약속이었고, 그리고 “오산으로 '성서조선'의 밑돌을 삼는다”는 위대한 약속이었다. 감히 '오산으로 내 생의 마침표를 찍겠다'는 것이었다. 그 서원이 곧 내촌에게서 받게 되는 저 자원세례(自願洗禮)였다. 그러나 동경고사의 졸업을 목전에 둔 함석헌은 “나는 이제 내가 나온 오산으로 돌아간다”는 결심을 이미 한터에도 왠지 텅빈듯한 마음을 어쩔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오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한편으로 거세게 일어오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의 특징이 어떤 것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함석헌은 하나님까지도 '영원한 미완성'이라 했으니까. 또 다른 생각대로라면 학문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함석헌을 연구실 사람으로, 학교인으로, 소위 석사요, 박사요 하는 자리에 두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차라리 역사적인 제물로 쓰시기로 한 것이다.

벌 받을 역사의 신생을 위한 제물로 말이다. 그 제물은 처절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죽기로 약속된 것이으니 그래서 망하게 된 역사(朝鮮史)를 살려내야 한다. 졸업식을 마치고 귀국할 체비도 다해놓고 이제는 귀국하는 일만 남았는데, 함석헌은 우찌무라 성서집회의 참석도 마지막이 된 시간에 선생께서 세례를 베풀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함석헌은 이전 우찌무라 선생이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본적도 없고, 또 세례를 베푼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도 없었다. 세례는 목사님만 베풀수 있는 것으로 알아온 함석헌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내촌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례는 받아도 좋고, 아니 받아도 좋다. 받음으로써 믿음이 굳건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내가 세례를 줄터이니 오라” 하신다. 학문을 좀 더 계속 할수는 없을까? 하면서 적지않은 망설임속에 있던 함석헌은 약속된 날, 정해진 시간에 내촌을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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