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참여(participatory)다. 평신도의 참여 없이는 교회의 부흥이나 선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의 대형화되고 표준화된 교회의 수직적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그때는 설교라는 정보를 교회에 출석해서만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교 듣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고 이것이 조직화되고 대형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직적 조직을 필요로 한 것도 사실이나 지금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의 특성상 교회는 다양화 전문화된 소그룹 교회나 전문화된 소그룹 선교회가 필요한 시대다. 그뿐 아니라 설교를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세계 어디서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 설교 듣기 위하여서만은 출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교회가 설교의 문제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솔직히 체육관 식의 대형교회는 부흥의 원동력이 은혜로운 설교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설교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교육이라는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도를 모이게 하느냐이다. 여기에 디지털시대의 특성인 참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모든 성도들을 설교의 청중에서 교회공동체의 참여자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위 성직자들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운영되어진 교회의 모든 기능을 평신도의 능동적인 참여체제로 바꿈으로서 평신도들의 참여의 즐거움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비성서적이다. AD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표시가 된 기(flag)를 앞세워 적을 정복하라는 꿈을 꾸고 전쟁에서 대승한 후 기독교가 합법화되고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주제도의 조직이 교회 조직에 유입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신약성서의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출발이 된 것이다. 이런 계급조직은 서로가 머리가 되려는 지배와 피지배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고(막10:35∼45) 급기야는 중세 암흑기 같은 인류사적 범죄를 교회가 저지르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의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는 말은 직책(office)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따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기능(function)인 것이다. 성직자든 평신도이든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한가지 직책(office)뿐인 것이다. 감독이니, 집사니, 목사나 장로라는 신약교회의 직분은 계급이나 신분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상호 교환적(interchangely)인 역할분담인 것이고 제도화된 것(institutionalized)도 아니었다.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용어부터가 AD4세기 이후 만들어진 천주교의 비성서적 산물인 것이다.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 불붙기 시작한 종교개혁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란 것도 발견한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목회자인 것이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으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직자가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에는 성공하였으나 만인제사장의 직분을 돌려주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계급의식은 아주 자연스런 교회의 유산으로 오늘에 이르게까지 고착화 되어온 것이다. 1950년경부터 서서히 모든 크리스찬들은 목회자(minister)라는 신학적 재발견이 시도되고 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령강림과 동시에 모든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시대의 신분의 벽, 인종의 벽, 성별의 벽, 문화의 벽, 정치적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이 교회를 혹독하게 핍박한 것도 바로 이 사회적 벽을 허는 교회의 기능을 두려워 한 것이다. 18세기 웨슬리안 경건운동은 평신도들에 의한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미국에서 폭발한 성령의 운동이나 1907년 평양의 성령운동도 모두가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사도적교회(New Apostolic Church)운동은 모두가 평신도 중심 교회개혁운동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유교적 관습과 일본식민통치, 군사독재문화의 잔재가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담을 만들고 있다. 이 담을 헐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 평신도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한 새로운 교회 기능을 회복하여야 젊은 디지털 세대가 교회로 다시 모일 것이다.서울성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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