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제자들과 함께(박정희 군부 통치시대).

무국적의 떠돌이


자신을 구타해놓고 도망쳤다가 이튿날 '선생님'을 다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울며 용서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이유, 어떤 경우의 폭력도 범죄'라며 엄히 꾸짖은 함석헌은 학생들이 돌아간 후에 도 울고 또 울었다.

그때만이 아니었다. '선한목자'로서의 오산 10년 세월이 그랬고, 38년 오산을 떠나 47년 분단 사선을 넘었으니, 오산을 떠난 이후에도 지속된 일제치하 8년에 북한 공산치하 2년을 더한 제2의 10년이 또한 그랬다.

아니, 함석헌은 아예 '우는 자'로 세상에 왔다. 일제의 체제를 벗어나 내 나라 찾았다면 자유와 평화를 누려야 당연하다 할 것이었다. 그런데 함석헌에게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적어도 현실적으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함석헌에게 러시아와 북한의 공산정권은 일본의 그것보다 더욱 엄혹하고 악독했다.

차라리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 그에게 하늘은 그것까지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러시아 군정이 그를 소위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스파이로 활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철저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한 제자까지도 그의 인격에 감복해 그의 월남을 강권하자 그 한(恨)의 38선을 넘어 아, 자유의 땅을 찾아왔는데, 그곳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나 그때나, 이곳이나 그곳이나, 함석헌에겐 사람 살 수 없는 땅이라는데는 다름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몸 전체를 내던지는 치열한 항일의 투쟁끝에 해방이 왔는데 함석헌은 왜 일본에서와 꼭같이 제 땅에서도 범죄자요, 반동자여야 했을까?

사회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라면서 의시하고 감시하고 묶어다 감옥에 가두고, '기어나와야 하도록' 짓이기고 고문하는 그런 참상을 이기고 견디면서 민주·민족 진영을 찾아왔는데, 그렇게 찾아온 대한민국에서도 함석헌은 여전히 잡혀가고 갇히고 수염 뽑히고, 그가 삶의 본질로 아는 것이 씨알이요, 정신(精神)이었는데, 그 국가권력이라는 것으로부터 그는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울려고 온 사람


함석헌을 내 땅에서 나그네로 떠돌게한 또다른 세력으로 한국 기독교(?)가 있고 무교회가 있다. 그들은 함석헌을 '이단'이라 했고, '변절'이라 했다. 왜 그랬을까?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시작된 군사정치 30여년 동안 심혈을 다해 민중·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민중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계훈제는 함석헌을 일컬어 '그는 울음의 사람, 울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갈파했다. 계훈제는 함석헌의 출신지인 용천과는 40㎞쯤의 상거를 둔 선천출신으로 (1921) 어려서부터 '함도깨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함석헌의 이름을 들으며 자랐다.

그가 함석헌에 대해 특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선천의 신성중학교 3학년 재학중일 때였다. 선천 신천중학교에 심인곤이라는 영어선생이 있었는데 그 별명이 '심꼬쟁이'였다.

원칙과 규범을 제 살 지키듯 하는 이였다. 그는 원칙과 규범으로 신(神)을 삼고 살았다. 해방 후엔 남하하여 연희대학에서 영문교수를 하기까지 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신성중학의 심인곤, 곧 '심꼬쟁이'를 말할 때는 약속이나 한듯이 함석헌, 곧 '함도깨비'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었다.

함석헌과 심인곤을 함께 띄울 때는 '누가 한수 더 위냐?'해서였다. 그 계훈제 역시 남하하여 경성제국 대학생이 되고, 해방직후 그 민족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을 주도했고, 이후부터는 반독재, 반군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다.

그 역시 울면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함석헌을 일러 “선생님의 일생은 외로운거 하고, 울음이었습니다”(1989. 2월호 씨알의 소리. p.145. '함석헌 선생님을 생각하면서')라고 했다.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후에는 그의 다섯째 사위가 되었던 장기홍(경북대학교 지질학 명예교수)은 함석헌을 일컬어 “오랫동안 그에게 배운 내가 늘 느끼는 것은 그이야말로 참으로 '타고난 교사'라는 점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항상 '홀로 가는 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타고난 교사에 홀로 가는 이, 함석헌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지만 오산에서의 그는 이상스러우리만큼 온오산(全五山)을 품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오산학교 학생들은 그를 일러 '함도깨비'라 했는데, 함석헌을 예언적 문필가(?)로 문단(?)에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 안병욱(숭실대학교 철학 교수)은 '함도깨비'를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하고 있다.

“함선생님이 오산중학교에 교편을 잡고 계실 때, 많은 학생들이 '도깨비'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오산의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 도깨비라는 이야기를 늘 합니다. 도깨비라는 말은 두 가지 뉘앙스를 풍기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신출귀몰(神出鬼沒)이라는 말이 있듯이 재주가 대단히 비범한 것을 말합니다. 놀라운 재주들의 소유자를 일컬어 우리는 도깨비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수학선생이 수학문제를 몰라서 함 선생님께 물어보면 시원히 가르쳐 주시고, 영어선생이 영어문제가 잘 해결이 안돼서 함 선생님께 물어보면 시원히 가르쳐 줍니다.

무노부지(無所不知). 무엇이나 잘하시기 때문에 학생들의 눈에 도깨비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도깨비라는 말의 또 하나의 뜻은 '괴짜'라는 말입니다. 보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생활하는 것이 모두 비범(非凡)했습니다.”

함석헌이 살고 간 32,105일. 함석헌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많은 말로 전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가막힐 정도로 그의 삶이 예수의 삶과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艱告)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이사야 53:3).


오직 한 싸움 참(眞理)의 실현


함석헌은 스스로 서원한 선한 목자로서 학생들을 길러내고, 가르쳐 갔다. 함석헌에게는 죽어도 버릴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제자들을 '뜻의 아들', '절대의 아들'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함석헌을 말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산에서의 함석헌을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그 오해란 함석헌을 소위 '애국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혈투(血鬪)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그의 항일투쟁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애국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2,105일 그의 일생의 싸움은 오직 하나 진리의 실현, 참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그가 월남한 이후 '일본의 악'에 저항하던 것과 똑같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와 군정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함석헌을 향해 “3·1운동은 우리를 지배하려던 다른 민족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민족 안의 일이 아니냐? 이제는 가능한한 협조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정권을 향한 그의 격렬한 저항을 비난했다.

이같은 비난에 함석헌은 거의 성자에 가까우리만큼 고요하면서도 그 대답은 아주 단백했다.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일제시대에 싸운 것은 일본인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그 불의 때문에 싸운 것이다. 오늘의 악을 싸우지 않고 그냥 두고 보면 무조건 정의가 되느냐 하면 아니다. 민족이 정의 안에 있지, 정의가 민족 안에 있는 것 아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이다' 했다. 아무리 한 피에서 났더라도 형제의 인권을 짓밟으려는 자는 가차없이 잘라버려라. 그것은 우리 형제가 아니다.”(전집 17, p.114, 1984 한길사)

그랬다. 그래서 함석헌에겐 일본이 적국도 아니었고, 대한민국도 그의 나라가 아니었다. 온 나라를 자기 나라로 품고 있으면서도 함석헌은 '제 나라 없는 자'로 떠돌았다. 함석헌에게 있어 제 나라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래서 그 나라가 오기까지 함석헌은 나라 없는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울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겐 '어느 땐 나도 내 집에 드는 날이 있겠지' 하는 기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듯 눈물로 살고 간 그의 인생은 어쩌면 그가 울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자신의 특별한 역사적인 사명을 명지해 자취(自取)한 것이었을까?

그는 '사람과 삶'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사람된 점은 다 같지만 그 같은 사람됨을 세상에 둘도 없이 저만 독특하게 가지는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람이다. 독특한 살림으로 나타냄 없이는 삶이란 그저 죽은 하나의 추상일 뿐이다. 역사의 사건도 그렇다.”(전집 17권, p.111, 1984 한길사) '저만 독특하게 가지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 살고 간 사람 함석헌!

함석헌이 교실에 들어오면 학생들은 상당한 두려움과 기이한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특히 그의 정말 묘한 수업방식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하, 하던 찬탄이 경외감(敬畏感)으로까지 승화해 가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맡은 교과가 수신(修身)과 역사였다. 함석헌이 가르치는 수신교과서는 일본어로 된 것으로 일본이 일본 국민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 교과서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1904)는 철저한, 성실한 그리고 부지런한 삶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 함석헌이 제자들과 함께 가지고 있는 교과서는 일본 왕을 우상화 하는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 내용중엔 일본을 본국이라 주장하면서 왕을 천왕이라 칭하고, “특히 조선인들은 천왕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고 오도하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여기에 황국신민(皇國臣民)화를 위한 일본의 온갖 탄압과 유혹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과 유혹이 징그러웠던 만큼 함석헌의 저항 역시 지칠줄을 몰랐다. 일본이 뭐라거나, 주변이 뭐라거나 함석헌은 우리말로만 가르쳤고, 학생에게 내어주는 숙제는 '오늘 배운 교과서 내용 전체의 한문에 한글로 토를 달아오라'는 식이어서 함석헌은 일본어 교과서로 휼륭하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학생들이 함석헌을 경외감으로 대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보여지는 그의 애국자적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속의 빛'이 피어나옴을 보면서였다.

함석헌의 평생의 삶이 '지극'이었지만 오산학생들에게 함석헌의 사사건건은 그야말로 빛이었다. 함석헌이 1928년 봄. 오산에 부임하면서 부임인사에 앞서 찾아 읽은 바 있던 그 요한복음 10장의 '선한목자'를 기억하는 학생들에겐 더욱 그랬다.

사실 부임 초기 그는 아주 고집스런 선생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헛소리, 웃기는 소리 전혀 없고, 언제 봐도 흰두루마기, 흰고무신, 손에는 무슨 책인가가 늘 들려있고, 밤에는 심야에도 불이 꺼져있는 것을 거의 볼수가 없는, 마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홀로 앓는 듯,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문제, 특히 생(生)과 관계된 경우는 어떤 경우에도 그저 넘어가지 못하는 이었으니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193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학생들에게 새로히 이해되어 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보다도 학생들에게 '삶을 고민하게 하는 선행'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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