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서 '함께' 거하고 계심과
다시 세상에 오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사는 이들이 크리스찬들이다.
사진은 터키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 고고학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시민.

기독교 역사 과정마다에서 '자기 이해'를 해낼려면 그 정황,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강림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구약에 대한 현명하고 정확한 탐구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


1. 왜곡된 기독교

예수의 명령으로 표현된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였다.

또 하나, 요한복음 16장 12∼13절에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 하였다.

사도행전 1장 8절과는 느낌이 다른 말뜻이다.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은 성령 하나님이 십자가 세례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오신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임으로 알고 있다.

단, 사도행전 1장 8절과 2장 1절 이하에서 성령 하나님이 지상강림하신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나 요한복음 16장 12∼13절의 간격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16장 12∼13절이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한다. 사도행전 2장을 단순 도입을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던 그 해 오순절이 성령께서 오신 날이 되지만 성령의 어떤 모습이냐에 대한 부분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에 근거한 기독교 2천여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령강림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균형이 동반 된 성령시대를 대표하고 대변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왜냐하면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의 지나친 신자관리에 의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스데반의 순교, 율법사 사울(후에 바울)의 살인 행위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했으며, 예루살렘은 물론 사마리아와 유다지방을 그때 빼앗겨버린 이후 기독교는 아직도 회복을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의 기본 위치에 계시는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는 물론 성령의 위치가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

예수님의 위치가 흔들린다 함은 신성과 인성의 조화를 이룬 하나님으로의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가 성립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정통 양성론과 단성론 아류들간의 세력비교를 하면 이 세상의 종교들을 따르는 단성론 세력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기독교는 타 종교와 똑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또 예수는 사람으로 오셨으나 곧 하나님이시라는 이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하여 그분의 인성(人性)을 부인하고, 예수는 사람일 뿐이다 하여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기독교 명단 안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제1세기 초중반에 예수의 친 동생이기도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감독을 하면서 바울사도의 3차 전도 여행기부터는 큰 타격을 주었다. 역사적 근거가 있다.

우리의 교회사를 기준해 볼까? 필립 샤프(philip sharp, 1819∼1893)가 좋겠다. 그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성서 신학자요 교회 역사가이니까. 그의 책에서만 살펴보아도 기독교는 니케아 제1차 회의(AD 325∼)부터 제7차 니케아회의(AD 787)까지 기독교는 예수가 누구냐? 에 대한 기독교를 신학은 확립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론이 흔들리니 성령론 또한 흔들릴 수 밖에….

드디어 AD 1054년에는 동·서 교회가 성령론 시비를 하다가 합의를 이루지 못해서 영원히 결별하고 말았다. 저들의 성령론 주장을 들어보자.

서로마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시나 성자를 경유 한다' 하였고, 동로마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께 로서 나오신다'고 단정한다. 동서로마 교회의 성령론은 니케아시대(AD 325∼789)와 그 이후 AD 1054년 동서로마 교회의 완전 결별까지 계수해서 '성령론 시비를 하다가 망했다.

AD 1054년 이후 십자군 전쟁기(AD 1096∼1291) 때는 물론 르네상스기를 지나서 종교개혁기(AD 1517∼)이후에도 성령론은 흔들리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성령론, 기독론, 하나님론(신론)은 삼위 상호간의 조화를 생명으로 하는데 각론에서 시비가 되고 있으니 '삼위일체' 인들 균형과 조화의 틀을 이루었다 하겠는가.

21세기 현재, 아직도 기독교는 기독론이나 성령론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갖고 있으니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2장을 통해서 그때 교회환경을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2. 초림과 재림


역사는 과거의 공부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공부이다. 교훈으로서 미래 뿐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위한 미래사 탐구가 되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는 '예수 재림'(마 24:29∼31, 막 13:24∼27, 눅 21:25∼28)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역사과정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 역사 과정마다에서 '자기 이해'를 해낼려면 그 정황,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강림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구약에 대한 현명하고 정확한 탐구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해란 소화(消化)까지를 말한다.

역사 이해는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앞서 말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분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성령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사람은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은 너희에게 알리시리다'(요 16:13)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역사의 이해는 역사의 해석이고, 예언 발상(상상)을 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기독교는 사탄의 방해와 저항 속에서 역사 위에 메시아 예수께서 터를 잡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책임 때문에 세월을 무서워하면서도 재림을 약속하셨음에 은혜요 복(福)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오심(초림)의 날 동 안에 다시 오심(재림)을 함께 준비하는 복수대안을 가지는 것이다.


3. 힐렐과 예수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분이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의가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틈바구니에 함께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예수는 현자(賢者), 성인(聖人), 성현(聖賢) 급으로 신뢰하는 자들이 신자 속에 있지만 그들은 자연인(Naturalman)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예수와 동반의 삶을 약속받는 일, 곧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절차(갈 2:20)를 갖추지 못했기에 자연인(自然人) 들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스승인 힐렐(Hillel)의 제자라고도 말한다. 힐렐은 예수그리스도 직전 시대 유대교의 큰 학자였다. 당시 그는 삼마이(shammai)와 쌍벽을 이루었으나 삼마이 보다 훨씬 더 영적인품과 학덕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힐렐은 힐렐 1세 또는 대 힐렐(hillel The Great)로도 불리운다.

이렇게 훌륭한 힐렐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메시아로 곧 가까이 오고 계신다는 역사적인 현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욕심대로 힐렐은 예수를 자기의 제자로 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예수의 기준으로 볼 때 눈먼 소경이요 영적 문맹일 뿐이었다.

힐렐과 함께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선지자인 이사야 같은 분은 예수보다 700여년을 앞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모습을 너무나 정확하게, 백분율로 한다면 99.9% 확률을 지닌 선지자였다.

이처럼 하늘나라 지식은 시공을 초월하는 권능을 갖게 한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은 힐렐이라 해도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임마누엘 되심을 몰랐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몰랐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하늘법칙을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가 예수에게 망신을 당한 요한복음 3장 분위기가 이 대목 이해에 큰 도움이 되겠다.

이 수준의 인물들은 공·노·맹·장자는 물론 석가모니 붓다까지도 동류의 범주 안에 든다. 어디 그 뿐인가, 단군 할아버지를 포함한 퇴계·율곡·다산은 물론 근대의 인물들 중 기독교 냄새를 피운 이들도 예수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심을 믿는 기독교 정통신학에 기준하면 성인과 현자들의 울타리 안에 머물 리게 된다.


4. 예수, 그 가까이에서 증거한 자들


1) 모친 마리아(눅 1:26∼38)
2) 시므온과 안나(눅 2:22∼38)
3) 세례자 요한(요 1:35∼36)
4) 12제자와 70문도

기독교는 이같은 형식을 외면하고 무리수를 두다가 현재 역사 위에서 절반의 상실을 각오해야 했다. 너무 서둘렀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서 원인을 찾는다면,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약속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성령강림' 문제이다. 성령 강림과 그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영과 혼 또는 그 육체까지를 완전히 장악하는 단계가 '성령모심'이 되고 '성령과 함께 하심' 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4절과 요한복음 16장 12절과 13절에 대한 탐구에 한 번 더 몰두하면 깨달음이 오게 되어 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를 완벽하게 장악해서 예수의 입에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를 고백하게 했듯이 모든 믿는 신자들이 예수와 똑같은 고백을 내놓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성령의 인도로 예수를 만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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