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5)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불편하게 전개되고 있는 기독교의 초대 현실을 일단은 안타까워하면서 역사진행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기독교가 왜곡되어 있다고 했는데,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것 같기도 하다.

선교현장에서 돌출한 사탄은 역시 예수는 누구냐에 집중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 '예수'를 왜곡하고 있다고 한번 쭉 거세게 항의를 하고 변증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기독교 역사' 는 그 안에 교리사, 생활사, 변증사가 복합되어 있다. 그 내용을 함께 갖추어 가자면 필립 샤프(philip sharp, 1819∼1893)처럼 복잡한 교회역사 기록물을 남기게 된다.

나는 이를 분류하여 교리사, 생활사, 변증사로 별도 취급하기로 하고 금번의 연재를 통해서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회 역사의 골격을 조화롭게 살펴보려고 한다. 현재까지의 기독교 2천년여년의 역사를 시대별로 동시성을 발휘하여 유럽 중심의 서로마 역사, 동로마로 분류되던 그리스와 콘스탄티노풀 중심의 역사, 어찌보면 제 3지대의 교회사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기독교 역사학이 선물한대로 동 교회(The church of the East)의 역사로 분류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서 기독교 아사아사의 부분을 취급하여, 정리하면 서로마사, 동로마사, 동교회사로 분류 각 지역의 성장사를 탐구키로 한다. 이 과정에서 본 연재는 서로마 교회 곧 지금의 로마 가톨릭이 일방적으로 정리한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 하고자 함이고 또는 '해체 복원의 파격을 통하여' 좀 더 객관성을 유지해 보고 싶다. 필자가 '좀 더'라는 부사형 어법을 동원해 보는 것은 아직까지 16세기 이후에 태어난 '기독교 신교'가 독자적인 교회사의 골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가모 교회의 전신인 그들의 시전 기둥.

그러므로 금번의 연재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이끌어 올리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런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등장 이후의 기독교 역사를 균형있게 탐구해 보고자 한다.

오늘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형성된 각 지역 교회들의 원칙을 밝혀 보기로 하자.


1. 세계사 형식의 훈련기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의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였다. 이 말씀을 따라서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의 위력은 먼저 예루살렘에 교회를 일으켰다.


1) 예루살렘 교회

사도행전 기록 수순대로이면 베드로의 대담한 말씀 선포에 따라서 3천명, 또 2천여명의 새로운 시대 인물을 찾아서 교회의 기초를 닦는다(행 2:14∼). 이어서 '예루살렘 공동체' 라고 호칭해도 될 집단이 등장한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는 무슨 징조일까?

예루살렘 교회, 또는 예수 교회의 모형일까?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이는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특별히 내세우시고 예루살렘의 교회를 기존의 교회와는 차별성을 지닌 새 공동체로 제시하신 것일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의 초기 현상일까? 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에서 나타난 초기현상 중 하나라면 지나쳐 버릴 수 있으나 만약 사도행전 저자가 문제 제기를 한 것일 경우, 오늘의 우리는 더 큰 고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4:32 이하의 현상이 예수시대의 기본형 교회라고 했을 때 사도행전의 신약교회 역할인 바울의 활동과 비교한다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장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매일예배 형식의 생활교회, 또는 교회를 위한 별도의 예배일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를 긴장시킨다. 이를 또 다른 측면에서 살피면 예수의 교회는 기존의 종교와 다른 교회 또는 종교 아닌 종교의 제시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서 회심하여 예수의 사람이 된 사울(바울)은 사도행전 13장 이후 기독교 시대의 독무대를 펼쳐가면서 유대교 회당식 교회를 지향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문제는 교회사적 관점에서도 그냥 지나가기는 벅차지만 바울신학 부분에서 더욱 치밀한 탐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시, 예루살렘 공동체, 곧 사도행전 4:32 이하의 교회를 기준하여 바로 이 모습이 예수의 새 종교, 또는 종교 아닌 종교시대의 기본모형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사도행전 4장의 예루살렘 공동체와 사도행전 13장 이후 바울에 의해서 전개되는 유대교 회당식 교회시대 부분은 21세기 현재에서도 비교하여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재림시대를 예견해 보는 과정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행전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된 이들 부부의 문제는 초기 기독교 교회 운동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새로운 출발점이기는 해도 윤리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수용할 수 있지만 비록 예수의 은혜라 했을지라도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단번에 완전을 요구할 수 있느냐에서 고민해 볼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청하여 다른 형제들의 모범을 따라서 자기들의 재산을 매각했으나, 막상 사도 베드로 앞에서 전액을 내놓으려니 잠시 망설이다가 결론을 내린 것이 절반을 내놓으면서 전 재산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결과는 그들 부부가 절반을 내놓으면서 전부라고 거짓말 하는 행위가 목숨과 맞바꾸는 형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자기 재산을 내놓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시간에 절반을 내놓으면서 전 재산이라고 해서 베드로를 속였다. 성령 하나님을 속인 결과를 가져온 이 부부의 죽음이 거짓말을 한 죄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기가 자꾸만 망설여진다. 그보다는 아나니아야! 또 삽비라여! 성령께서 지켜보신다. 다시 말해 보거라. 이것이 너의 재산 전부냐 아니냐? 말하라. 한번 쯤의 용서는 예비되었느니라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2)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을 부르시고 사울(바울)을 앞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은?

(3) 예루살렘교회의 변질
스데반이 사울의 폭력 앞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야고보가 죽는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헤롯의 칼에 죽는다. 사도들의 핍박 또한 극심해지고 베드로가 옥에 갇힌다(행 12:1∼5).

(4) 예수의 친동생 야고보 등장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이 무렵 예루살렘교회의 교회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유대교와의 차별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예수의 동생들은 예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갖추지 못했었다(요 7장 참조). 그들 중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은 그래도 고맙기는 하지만 야고보 감독의 행실에 대한 부분은 좀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자처했다는 학설이 있지만 야고보는 예수가 누구냐에 대하여 실패한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 선교사직을 사절했다는 사실 앞에서 기독교는 한 번쯤 크게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의 감독관 앞에서 벌벌 떨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갈 1장 참조)나 베드로의 유약한 모습이 바울 사도의 고민이었고, 부득이 3차 전도여행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선교역사에서 겪었던 고충도 살펴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격을 더 깊이 헤아려 볼 준비를 각자가 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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