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펜실바니아 펜들힐 퀘이커 수련원에서의 함석헌 선생(사진 오른쪽).

함석헌이 '선한 목자'를 하늘에 서원했을 때부터 그의 생의 주제였던 고난(苦難)이 그의 살 속에 혼 속에 깊이 서리기 시작했다. 함석헌의 일생엔 두 가지 주제가 있었다. '참'과 '고난'이 그것이었다. 생명이 생명됨에 있어 혼과 육이 합일되어 가능하듯이 이 참과 고난이 함석헌을 함석헌으로 살게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부임하던 첫날, 요한복음 10:11∼15절까지의 성경말씀을 읽고 나서 부임사를 했는데, 함석헌이 이 부임사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한 서원이 '선한 목자'였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선한목자란 예수인데, 이 예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로 나타난다.

함석헌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버리는) 예수를 자신의 모본(模本)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오산의 함석헌은 무엇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었다. 예수를 사는자였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기대도 '식자(識者)됨' 보다도 '사람됨'에 있었다. 오산교직 10년의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도무지 '공부 잘해야 한다', '일등해야 한다' 따위의 소리를 해본적이 없었다. 제대로(as it is) 된 놈, 그것이 오산의 아들들을 향한 함석헌의 꿈이었다.

함석헌과 김언병 군의 이야기


함석헌과 그의 제자 김언병 군 사이에 있었던 사건은 함석헌의 교사로서의 자세가 얼마나 치열했었는가를 증언해준다. 김언병은 1930년 입학생이었다. 김언병 군의 집안은 오산고보와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친형 김은병이 1회 졸업생으로 큰 부자여서 크고 작은 일에 끊임없이 도움의 손이 되어 주었고, 형의 주장으로 그의 친조카인 김동제 군까지도 오산학교를 다녔다. 게다가 김언병 군은 공부 잘하고 말도 잘해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김병언 군이 함석헌에겐 늘 아쉬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똑똑하고 영리한데 참되지 못한 구석이 보여서였다. 함석헌은 교편생활 중에도 자신의 집을 학생들의 하숙으로 제공하고, 하숙에 든 학생들의 뒷바라지에 사력을 쏟았다. 참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거짓됨, 그것은 함석헌에겐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었으니. 오산학교를 스스로 물러난 이후 그에겐 또 하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로 '비겁(卑怯)'이 더해진다.

김언병 군이 3학년때의 일이었다. 어느날 언병 군은 술 생각이 났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날 포도주 생각이 나 마을에 있는 가게에서 포도주와 안주감으로 과자 한 봉지를 사가지고 나오다가 하필 함석헌에게 들키게 되었다.

당시 철저한 기독교 학교였던 오산에선 술 마시는 것이 발각되면 퇴학조치를 하게 되어 있었다. 김언병 군은 정신없이 도망을 쳤지만 언병 군을 쫓는 함석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언병 군은 골목길로 빠져 자기 하숙집 나뭇단 속에 술병과 과자봉지를 숨겨놓고 돌아 나와 함석헌 앞에 섰다. 함석헌에게 교무실로 끌려가 장시간 추궁을 당하던 언병 군은 다시 한 번 선생을 속이기로 한다.

“선생님, 소변이 좀 보고싶습니다. 소변 좀 보고오게 해주십시오.”

다녀오라는 함석헌의 허락을 받은 언병 군은 같은 하숙집에 있는 장(張)이라는 친구에게 “내가 하숙집 나뭇단 속에 포도주와 과자를 숨겨놓았는데 그 술병을 멀리 좀 치워달라”고 부탁하고는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실을 실토하는 듯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들이 상점출입을 자주 하면 안된다고 했는데도 과자가 먹고 싶어 사가지고 나오다가 함 선생님을 뜻밖에 만나게 되어 부끄러워 도망하여 하숙집 나뭇단 속에 감춰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어디 가보자.”

언병 군은 함석헌과 함께 '이젠 됐다'며 속으로 안심하면서 하숙집으로 가 술병과 과자봉지를 숨겨놓았던 나뭇단을 뒤적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나뭇단 속에 술병은 치워져 과자봉지만 남아있을 것으로 믿고 선생님과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왔는데 술병 뿐만 아니라 과자봉지도 없어져 그 속이 아예 비어있는 것 아닌가? 과자봉지는 놔두고 포도주병은 치워버리라는 언병 군의 부탁을 받았던 장 군이 너무 다급한 나머지 과자봉지까지 몽땅 치워버렸던 것이다.

언병 군은 선생님이 두려웠다. 함석헌은 학생들을 꾸짖어야 하는 때, 어떤 경우에도 음성을 높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천연하다. 언병 군은 함석헌의 그 천연함이 정말 무서웠다.

“야, 이놈아. 선생님을 속여?” 하고 고함을 치면 차라리 났겠는데 문제가 생기면 함석헌은 아주 침착, 천연해진다. “교무실로 오너라.” 그저 딱 한마디 한 함석헌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서 간다. 다시 교무실, 함석헌 앞에 선 언병 군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교무실에 들어와서도 함석헌의 말은 한마디였다. “사실대로 말하라.”

선생도 제자도 말없이 장시간이 흘렀다. 이따금식 “사실대로 말하라”는 함석헌의 질책이 함석헌과 언병 군의 관계를 이어주고 있을 뿐. 그것은 제자를 향한, 제자를 위한 지극한 참의 훈련이었다. 참, 참을 살게 한다! 그래서 문제의 제자를 다그치면서도 함석헌은 지정(至靜)을 잃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라” 똑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한 때였을까?

말 한마디 없이, 꿈쩍않고 서있던 언병 군은 참 형용키 어려운 목소리로 “저, 학교 그만두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둔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언병 군을 여전히 꼭같은 표정으로 주목하던 함석헌은 “그래, 알았다. 오늘은 돌아가도록 해라” 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학교 일꾼을 통해 언병 군의 아버지를 만나 언병 군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 언병 군을 크게 꾸짖지 말라고 부탁했다. 언병 군은 그리고는 3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함석헌은 매일 퇴근길에 언병 군의 집을 찾았다.

언병 군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함석헌만 알고 있었다. 언병 군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함석헌은 언병 군을 만났는데, 3일째 되는 날 언병 군은 함석헌 앞에 무릎 꿇고 “선생님, 제가 나쁜짓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통곡을 했다. 언병이 주변을 놀라게 한 것은 그렇게 함석헌을 만난 이후의 모습이었다.

김언병 군은 함석헌의 주일마다 여는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하는 일에 두드러진 열심을 보이는가 하면 틈틈이 함석헌의 집을 드나들면서 할 수 있는대로 가사를 돕곤 했다. 게다가 주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신실해져 갔다. 정말 놀라운 것은 졸업한 이후 선택한 진로였다. 졸업할 때는 우등을 했다. 집 또한 부자였으니 대학 진학도 경제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집안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히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제겐 대학 가는 일보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말 가난한 곳,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바닥살이를 훈련하는 일입니다.” 너무도 진지한 언병 군의 말에 집안의 대단히 고압적인 어른들까지도 감히 안된다 할 수가 없었다. 언병 군은 더 깊을 수 없는 한 골짜기의 사립학교 선생으로 3년을 봉사하게 된다.

함석헌과 삶을 함께 한 김언병


함석헌은 그 언병 군이 크게 마음에 걸려 몇차례 편지를 통해, 또 직접 만나서까지 대학 진학을 권했다. 김언병 군은 두 말 없이 함석헌의 말을 좇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진학을 했고, 졸업 후 다시 귀국하여 함석헌과 함께 하기를 함석헌이 북한의 러시아 군정에 쫓겨 남하할 때까지 계속됐다.

해방 후 함석헌이 평북 임시자치정부 문교 국장으로 수개월 재임시 김언병은 사회과장으로 곁에 있으면서 심혈을 기울였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공산정권으로 굳어져 가면서 함석헌을 반동자로 낙인, 소환하고 체포하고 투옥하고 고문하는 고비고비마다 함께 했다.

드디어 함석헌에게 애국인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보고하라는 특명이 내려지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그의 몇몇 제자들이 함석헌을 월남시키기로 밀약하고 추진하는데 김언병이 이 일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함석헌은 그의 나이 60, 70, 80을 넘어 90에 이르는 동안 김언병을 잊지 못해 했다.
“우리 언병이는 어찌되었는지….”

김언병이 함석헌을 위해 그의 신명을 내놓게 한 그 기이한 힘은 바로 함석헌이 스스로 서원하고 지켜낸 그 교사상(敎師像)이었다. 함석헌의 넷째 사위인 지질학자 장기홍은 “비교적 오랜 세월 그를 배워온 내 눈에 그는 타고난 교사였다.” 했지만 실로 교사로서 함석헌은 '죽고 살기로'였다. 오산학교의 학생들이 함석헌을 더욱 신비의 눈으로 보게 한 것이 바로 그 교사로서의 자세였는데, 그 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뼛속까지 조선사람'으로서의 함석헌의 자세였다.

그의 제자들 눈에 함석헌은 대일본 제국의 철권 아래서, 이미 그 철권(鐵拳)을 제어한 듯 아주 단순한 조선 사람으로 조선 역사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이 오산에 부임하는 그때를 전후로 해서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본의 대조선교육정책은 실로 악랄했다. 소위 그 '대일본제국'의 재재다사(才才多士)들, 문인들, 예술인들, 학자들이 대거 동원이 되었고, 조선의 인사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책임주체가 되어 포고한 '제2차 조선교육령(1921∼1938)'이 그것이다. 함석헌이 오산고보에 부임한 것은 이 '제2차 조선교육령'이라는 것이 마치 단말마(鍛末魔)와 같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이 조선교육령의 핵심이 바로 조선인으로 일본인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내려진 조선 옷을 입지말라, 조선 이름을 쓰지 말라, 학교에서의 경우 일본말을 국어로(日本語=國語), 일본 역사를 국사로(日本史=國史), 그리고 그것을 일본말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속이야 어쨌던 교단에 서야 하는 경우 적어도 이 세 가지는 바로 '법'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조선의 것을 버려야 하도록' 정책을 수행하는데, 그 방법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매우 유연해졌다는 것이며, 많은 표창, 시상들이 제도화 되었다는 점이다. 함석헌 외에도 오산엔 애국교사들이 없지 않았다. 일체 조선의 것을 제거하려는 그같은 총독부의 교육령 아래서도, '그래도 나는 조선사람이다', '우리는 단군자손이다'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들려오는 그런 말들이 함석헌을 통해 들려 올때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조선사람이지” 하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더러는 그 말을 일본어로 하는데, 함석헌은 언제나 조선말로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 말을 일본 옷(양복)을 입고 하는데 함석헌은 언제나 조선 옷을 입고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 이름을 일본명으로 바꾸었는데 함석헌은 여전히 함석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석헌의 오른손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나도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하루는 김태훈(김언병과 동창생. 송산농업학원을 인수해 함석헌에게 헌증한 제자)이 길에서 선생님을 만나 아주 용기를 내어 청하기를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 책 좀 볼 수 있겠습니까?” 했다. 함석헌은 방긋이 웃으며, 그저 말 없이 그 책을 김태훈 군 손에 내어주었다.

그것은 누구의 저서가 아니라 몇 권의 노트를 묶은 것이었는데 그 표지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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