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7)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3) 미완의 스데반 공동체교회

베드로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향한 공격성 발언(행 5:1∼6)은 인류 최후의 심판일 경우는 또 모르겠으나, 하나님 지상나라의 회복 초기에 발생한 사태로는 지극히 비극적이다. 아나니아 부부가 적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새로 출발하는 기독교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닌데 그들 부부의 죽음은 너무나 아쉬운 돌발성인 것만 같다. 아나니아 부부 사건의 비중을 크게 본 이유 중 더 큰 부분은 '스데반의 제거'가 단계적으로 연계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자리하고 있다.

스데반은 예수 제자들 그룹 안에서 어느 누구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는 영적 수준에 있는 사람이다. 그가 남긴 자료는 사도행전 7장에 잘나타나 있다. 스데반 설교(사상) 내용의 핵심은 다윗의 성전론과 이사야 성전론 비교에서 이사야 사상을 선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66장 1절 이하의 이사야 성전론을 스데반은 잘 알고 있었으며, 이사야의 성전논리를 구체화시킨 예수의 성전파괴론(요 2:19)과의 만남을 이루면서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예수의 성전론(요 2:19∼)은 메시아 예수의 지상강림의 절대가치 부분이기에 우리는 스데반의 활동과 그 생애의 비극성을 주목하게 된다. 스데반을 모함하는 사람들의 발언 중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은…'(행 6:14)이라고 한 부분에서 보면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좀더 분명하게 살필 수 있다. 스데반은 그 시대 예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의 역사등장의미와 예수가 제시한 새 종교의 모형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의 새 종교론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예수처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2. 사마리아에 성령 임하셨으나…


사울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성령강림 초기 직계 사도들이 마련한 예루살렘의 징조를 차단했다. 스데반이 사울의 눈에는 비범한 존재로 확인되었을까? 사도행전 연구가들 중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빛, 곧 부활하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이미 그가 스데반의 위세 앞에서 기가 꺾였던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필자 또한 사울은 스데반의 당당한 '최후 관리 능력'을 눈앞에서 바라볼 때 그의 영적 우위를 인정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어찌되었든지 사울은 성령과 동행하는 사도들의 기세를 스데반 제거로 일단 제압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핍박이 강화되자 제자들은 사마리아 선교를 목표했다. 먼저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았다 하니 사도들이 기뻐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특별파송 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성령세례의 필요를 느끼고 달려갔다. 여기서 기록 본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를 이어받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행 8:14∼17)로 말씀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도들이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사마리아에 임하였다.

이와 유사한 부분을 하나 살펴볼까? 에베소에서 바울과 마주친 세례요한파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세례요한파와 대화 중에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고 물었는데,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렇다면 사안의 주요 부분이 '성령과 성도의 관계'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겠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때가 있었는데(요 4장 참고) 빌립, 베드로, 요한 사도의 발길까지 불러 복된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사도들의 지속적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앗수리아 침공 때(BC 722년)와 신바벨론 침공 여파(BC 580)로 혼혈지대가 되었던 옛 역사의 허물을 쉽게 털어내지 못했음일까. 사마리아는 끝내 저주의 상처를 씻어내지 못했다.

빌립, 베드로, 요한의 집중적인 관심을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예루살렘과 함께 이스라엘의 양대 축이 사마리아인데 저들이 역사의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현재 사마리아 인구는 그리심산 지역과 텔 아비브 지역에 각각 4백여 명씩 전체 인종이 8백여 명 남아있다. 만약 사마리아 종족이 소멸된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이 매우 어려운 지경으로 몰릴 수 있다. 저주의 극복(치료)은 쉽지 않은 것일까? (가룟 유다, 사두개파 유대인, 사마리아 등)


3. 에디오피아의 구원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는 또 하나의 소중한 기록이 있다. 마당발 빌립의 전도능력은 예루살렘 행사를 마치고 자기 고국 에디오피아로 가는 국고 담당 책임자인 간다게를 만나게 된다(행 8:26∼). 그때 간다게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가 대속의 메시아를 계시하신 대목을 읽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성경 이해의 지식이 수준급임을 알 수 있다.

구약의 대표는 이사야, 신약의 대표는 요한복음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는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대속론을 취급하는 성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성령님의 활동을 주목해야 한다. 성령께서 빌립더러 간다게에게 접근할 것을 명령하셨다. 신약교회는 성령과 성도의 연합을 통해서 세상 구원의 완성(완전)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 있음을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령 이해'에 서툴러서 종종 자기 신앙에 실패하는 이들이 있다.

성령과 일치된 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현장에 참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식에 이르지 못하여 로마의 동서 제국은 1천여 년을 싸우다가 AD 1054년에 완전 결별하였음을 역사는 기록해두고 있다.
그들 동서로마 교회의 성령론이 얼마나 엉성했는지 실례를 여기에 공개한다.

동로마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신다' 하였고 서로마(오늘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시나 성자를 경유한다'고 했다. 그러나 AD 325년 제1차 니케아 세계 공의회에서는 동로마 교회의 주장인 성령론을 회의록에 남겨두었다.

안타깝게도 동서로마 교회는 AD 1054년 결별한 후 아직도 서로가 소 닭 보듯 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자들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의 글을 읽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담당 보좌관쯤 될 내시 간다게는 빌립이 다가가서 읽는 바를 '깨닫느냐?'고 물을 때 빌립더러 자기의 병거에 오르라 하였고, 빌립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간다게의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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