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한·일회담 저지를 위한 모임에서 함석헌 선생(사진 왼쪽부터 예춘오, 문동환, 박형규, 계훈제 선생 등과)

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표지의 노트를 받아든 김태훈은 받아들고 나서는 어쩔줄을 몰랐다. 감히 그 노트를 자신이 한번보여 달라고 했고, 그래서 받아든 것임에도 두서너장을 넘겨봤을 뿐 눈앞이 캄캄해 왔다. 이제는 어서 돌려드려야 되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었다. 그때 함석헌은 다시 방긋이 웃으면서 조용히 태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선생님!”

태훈군은 그 노트를 다시 함석헌이 내민 손에 내어주고는 함석헌을 떠나 정신없이 한참을 내달렸다. 정말 정신없이 함석헌을 떠나 달린 것이다. 어디로 뛴다는 생각없이. 함석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겠다 하고 뛴것도 아니었다. 함석헌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온 김태훈은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도대체 내가 선생님께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내가 어떻게 감히….”

태훈군은 마치 큰 죄를 지은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주 자랑스러운 큰일을 한것 같기도 했다. 태훈군이 함석헌에게서 받아서 펼쳐본 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노트 두서너 페이지 마져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이상스러우리만치 '아, 조선아!' 하는 말과 한문으로 쓴 '苦難'이라는 말만은 끊기지 않는 여운(餘韻)이 되었다.


'성서'(聖書)와 '조선'(朝鮮)

역사 교사로서 함석헌에게는 두 개의 키워드(Kew word)가 있었다. 성서(聖書)와 조선(朝鮮)이라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키워드는 이미 동경고등사범재학 중 내촌(內寸)의 문하에서 만나게된 6인(김교신, 양인성,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 동우회의 좌표이기도 했고, 오산학교 역사교사로서의 좌표이기도 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앞으로 때가오면 책으로 출판하리라는 계획을 가지고 쓴 글이거나 쓰는 글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조선역사 시간이나 그가 이끄는 일요성경모임에서, 또는 김교신의 〈성서조선〉 독자들의 동계성서강습회(冬季聖書講習會)에서 끊임없이 설파한 내용들이 후에 그의 종교적 사상적 지인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단권으로 묶이어 출판된 것이다.

함석헌의 이 불후(不朽)의 명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다음장에서 자세한 언급을 하게 될 것이다. 그가 오산에 역사교사로 부임해 싸울 싸움을 못다 싸우고, 꼭 10년이 되는 해(1928∼1938) 오산을 떠나게 되는데, 함석헌으로 오산을 떠날 수밖에 없게 한 것이 바로 이 성서적 입장에서 보는 그의 한국사관 때문이었다.

그는 이 조선역사를 정말 고집스럽게 조선말로 가르쳤다. 그가 오산을 떠나는 전해 1937년은 일본의 동양패권전략이 구체화 되는 해였다. 민주를 침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위안부 혹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10만명이 넘는 젊은 조선 여성들을 징집해 일본군의 성적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다. 젊은 남자들에 대해서는 '군특별의용군법령'(1938)을 만들어 1945년까지 36만명을 일본군으로 끌고 갔다.

또 일제는 어떤 종류의 공적모임에서나 '나의 생명을 대 일본제국의 천왕과 그 영광을 위해 기꺼이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의 이른바 '황국식민칙서'를 암송하거나 낭독하게 했다. 1938년부터는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하기 시작하여,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받드는 신도주의(神道主義)를 강요했다.”(김성수 지음, 함석헌 평전, p.151, 삼인 2011. 3. 1).


외부의 압박이 이렇듯 전방위적으로 가해져오자 학교 당국으로서도 어쩔수가 없었다. 폐교를 각오하지 않는 한 함석헌의 역사교육과 그 방식은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 사임을 결단한 직후 그의 '평생의 친구' 김교신에게 보내는 편지에 “…학교의 교육방침과도 맞지 않고, 세상의 형편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만두려고…”라는 말이 있다.

'학교의 교육방침과도 맞지않고'라는 말은 학교가 이미 일본의 교육방침을 수용했다는 것이고, “세상형편도 그렇고”라는 말은 일본의 승승장구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같은 일본의 현상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긍정해가는 자신의 주변을 한탄(恨歎)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새요, 최후의 거점으로 믿어온 오산의 분위기까지 '친일'이야 아니라해도 이미 일본의 황국신민 교육정책을 부득불 수용하려는 이때에 이르러 함석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은 오산을 떠나는 것 뿐이라 여겨졌다.


“뒷줄을 끊어놓고"

그랬다. 이제 함석헌은 오산을 떠나기로 한다. 1928년, 꼭 십년전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해 올때 '선한목자'를 자임하여 왔던 함석헌은 오산과의 약속이 아닌 그의 '하나님'과의 약속이었던 그 선한목자의 상으로 오산을 떠난다. 그는 아주 확실하게 선한목자로서의 약속을 지켜낸다. 지난 10년의 교사로서의 자세가 그랬고, 그의 오산학교의 사범(師範)으로서 마지막 물러감이 더욱 그랬다. 역시 그가 그의 친구 김교신에게 보내는 편지 또 다른 일문(一文)은 “제(弟)는 지금 뒷줄을 끊어놓고 앞만 살피고 있습니다…” 한다.

'배수(背水)의 진(陣)'이라 했던가! '제(弟)는 지금 뒷줄을 끊어놓고 앞만 살피고 있습니다' 이 한줄도 못되는 몇 글자는 이제 정말 함석헌이 죽기로 주저항선(主抵抗線)을 찾아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오산떠남은 마지막 저항의 불꽃을 지피려는 거룩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가해지는 오산의 난을 피해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오산에, 이 땅에 가해오는 그 폭력의 본진(本陣)에의 저항이었다. 함석헌을 아는 사람들, 함석헌을 말하는 사람들, 함석헌을 주제로 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결코 오해해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함석헌의 저항'의 옳바른 이해인데, 도대체 함석헌의 그 격렬한 저항의 대상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그는 90평생의 일생을 불꽃처럼 살았다. 저항의 불꽃 말이다. 박정희의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 천상천하의 유아독존 운운하여 평생에 남 섭섭해 할줄 몰랐던 그로 “잘했거나 못했거나 정신하나로 살자해 왔는데 저들이 나를 정신이상자라 했다. 정신이상자란 소리들은 담에야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입에 거품을 물게 했던 그! 도대체 무엇이 그로 그처럼 저항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향해 그로 그처럼 저항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을까?

첫째, 그를 정말 정신 이상자처럼, 미친자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게 한 것은 그 속에 충만한 '민중의 영', 그 자신의 말대로는 '씨알'의 영이었다. 실로 그는 신비스러우리만큼 '맨사람'이었다. 민(民)이라는 말까지도 소위 국가권력에 의해, 가진자들에 의해 타락, 변질되었다면서 '씨알'이란 말로 고쳐낸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함석헌 안에서 씨알과 민중은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씨알은 보다 더 종교성을 띠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쌍놈 → 민중 → 씨알

함석헌은 민중을 씨알이라 고쳐 부르면서 다시 그 씨알을 보통말로 '맨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씨알이라는 말 때문에 그의 스승인 유영모와의 사이에 이런저런 말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씨알이라는 용어가 함석헌에게서는 분명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씨알 이전의 민중, 민중 이전의 쌍놈이었던 용어변화의 역사성 말이다. 함석헌의 위대성은 이 씨알의, 민중의, 쌍놈의 자리를 성수(聖守)해 냈다는데 있다. 그 자리의 지킴이 지나치다 하리만큼 요지부동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오해마져 불러오게 된다.

그는 씨알의 자리, 민중의 자리, 상놈의 자리를 '거룩한 곳'으로 지켜낸 사람이다. 함석헌에게 있어 생명의 자리가 된 이 씨알, 민중, 상놈의 혼이 함석헌으로 하여금 그처럼 꺼질줄 모르는 저항의 화염을 피어오르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 저항의 대상인데, 함석헌에게 있어 그 저항의 대상이란 이 상놈들→민중들→씨알들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일체의 것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3·1운동을 비롯해 오산에서의 싸움, 성서조선을 통한 항일운동을 애국운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함석헌의 저항은 그 안에 태생적으로 자리잡은 씨알의 영, 씨알의 혼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함석헌 사상연구원 연구위원이기도 한 함석헌 연구가 이치석은 그의 평전(시대의 창, 2005. 11. 15)에서 해방 후 월북한 교육사가 이만규(李萬圭)가 '교육의 파멸기'라고 규정한 일제말기 교사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 발표한 내용을(이만규, 조선교육사2, 1991, p.259∼260)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 이런 기록이 있다.

“강한 민족적 양심이 일본인의 제도에 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며 일본어로 교육하라는 학문과 지시를 듣지 않고, 교육계에서 떠난 이들이니 오산중학교의 함도, 중앙중학의 문모가 이런 예였다. 이 부류는 소수였다. 그 가운데는 일본어가 유창함에도 불구하고 차마 못하겠다고 나온 이도 있었다.”

이어 이치석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함모는 함석헌이며, 문모는 언론인이자 교육자인 문일평(文一平)이다. 또한 '일본어가 유창한 교사' 역시 함석헌을 두고 한 말이다.”

함석헌이 오산중학을 떠나는 1938년 3월 시작되는 졸업식 부터는 이전에 없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낭독해야 하도록 지침이 내려와 있었는데 이때, 하늘이 지은 사람 함석헌에겐 더 거센 회오리가 일고 있었다.

1938년 2월 어느날이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떠나는 날! 전교생들이 대강당에 모였다. 모이라 해서 모인거지만 그중에는 이미 이 모임의 성격을 알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교실에서의 강의를 일본말로만 해야 하는 때 개의치 않고 조선말로 하는 것은, 학교에서 추방당한다든가, 아니면 감옥에라도 갈 각오를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었지만 교직원실에서의 대화까지도 일본말로만 해야 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강당은 정말 고요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입추의 여지마저 없이 전교생이 빽빽이 들어찬 강당에 종종 누구의 숨소리인지, 땅이 꺼질듯한 숨소리가 모여든 가슴들을 뒤흔들어 댔다. 교장 주기용이 단에 올랐는데, 그도 한참은 뭐라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오늘 함석헌 선생님이 우리 오산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왜 떠나시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이 '이제 떠나시게된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였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설움이 복받쳐 왔지만 그러나 함석헌은 울지 않았다.

함석헌은 이 아픔이 새 역사, 새 사상, 새 종교를 잉태, 해산할 산모의 진통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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