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23)]


     1975년 한 〈씨알 모임〉에서 씨알을 말하는 함석헌 선생.

성지(聖地) 용골들녘


오산학교를 사임하고, 오산학교에서 용골(龍滑)로 넘어가는 언덕기슭에 자리한 함석헌의 농장은 그가 시대를 넘어, 종교계(界)를 넘어 그 자신의 하나님 '역사와 참'을 만난 곳으로 함석헌이 씨알(民衆) 철학을 창도한 이후 그를 따르게 되는 후학, 후진들, 제자들에겐 마치 성지(聖地)와 같은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이곳이 그가 내촌을 향해 아주 분명하게 '나, 함석헌'을 선언한 곳일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그가 그렇듯 솔직히 믿어온 조직기독교(組織基督敎)로부터까지 '자유'를 선언한 곳이다. 성경(聖經)만은 아직도 기독교 경전으로 믿고 있는 터였지만 '성서는 과연 기독교라는 종파의 경전인가?'를 묻기 시작한 곳도 이곳이었다.
1940년대 10년, 함석헌의 사상적 궤적(軌跡)은 상상하기도 어려우리만큼 파고를 일으키게 되는데 함석헌의 역사의 주체로서의 씨알, 하나님의 종자(種子)로서의 '씨알' 사상이 열리기 시작한 곳도 바로 여기, 용마을을 내다보는 '쫓겨난 자'의 일자리에서였다.

하늘이 그렇듯 집요하게 함석헌을 새 역사로 이끌어가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함석헌의 한순간도 한눈 팔지않는 지고(至高)하다 하리만큼의 그의 삶에 기인한다. 오산학교에서의 역사교사로서 자신이 맡은 제자들을 눈물과 가슴으로 키워내던 함석헌은 여기 '쫓겨난 자'로서의 일터에서 농사꾼으로서의 살림 역시 다름이 없었다. 그는 마치 농사하다 죽을 사람처럼 흙을 살았다.

세상 속에, 역사 속에 무수한 사상가들, 종교가들, 철학자들이 있지만 함석헌과 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그가 특이한 종교인, 사상가, 철학자로 느껴지게 한 것은 그가 쓴 말(言語) 때문이었는데, 그가 쓴 말은 학문에서 도출된 것이 아닌 그의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을 아예 알지 못하는 삶, 살림 그 자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에겐 이 '삶'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위대한 삶이 위대한 사상의 산물이라기 보다 위대한 사상이야말로 위대한 삶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말대로 한다면 그저 '삶', '살림살이'이다. 거기 어떤 형태의 품사도 덧붙여서는 안된다. '삶' 그 자체가 거룩이기 때문에. 이제와서 걸어온 길, 점점이 회상해보니 걸음걸음, 예까지 이어온 고난의 삶들이 한없는 은혜로 절감된다.

열아홉에 당해야 했던 평고(平高)의 제적, 제적 후 울면서 헤매던 두 해, 일본 동경 유학 중 관동대진제로 시체덤이 속에서의 감옥 하룻밤,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부임 10년 동안 일본의 국가주의와의 처절한 싸움, 특히 1930년 8월, 독서회(讀書會) 사건으로 일주일간의 투옥, 그리고 1938년 사임까지 함석헌 자신마저 딱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신비한 힘이 자신을 이끌어온 것으로 믿겨지는 것이었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그 이끄심이 절절히 고난(苦難)의 사건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이었다. 함석헌은 정말 여민 마음으로 그 고난을 주신 이에게 진하디 진한 감사를 드렸다. 함석헌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고난사건이 그를 거쳐갈 때마다 그의 사상, 그의 종교, 그의 철학의 깊이와 넓이, 높이가 더해 갔다는 것이다. 당하는 고난의 강도가 더할수록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함석헌의 크기 또한 더해가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고난사관(苦難史觀)


드디어 그는 고난을 예찬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난은 결코 정의(情意) 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인도의 위대한 혼이 말한 것 같이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이다(간디). 우리는 고난 없는 생을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은 삶의 한 끝이요, 병은 몸의 한 부분이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고난은 죄를 씻는다. 가성소다가 때를 씻는 것 같이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불의로 인하여 상하고 더러워진 영혼은 고난의 고즙(苦汁)으로 씻어서만 회복이 될 수 있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한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이 깊은 지혜를 알게 하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에 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쓰는 글자로만, 눈물로 그리는 그림으로만, 한숨으로 부르는 노래로만 나타낼 수 있다. 평면적·세속적 인생관을 가진 자는 저가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딤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 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낸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예외없이 고난의 선물이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궁핍에 주려보고야 아버지를 찾는 버린 자식같이 인류는 고난을 통해서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았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애굽의 압박과 광야의 고난 중에 자라났고, 인도의 철학은 강대 민족의 압박과 사나운 자연을 대적하면서 브라만에 이르렀다. 과연 고난은 우리 생명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자유의 제단에 알찐한 자기 희생과 견디고 참음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비록 그 인내의 힘을 끝점(죽기:필자주)까지 써내지 않으면 안되는 분한 일과 압박이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견디는 자라야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말씀은 진리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저희는 참 자유, 참 스와라지(自治)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저희는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간디는 '고난을 통한 평화'는 영원의 법칙이라 하여 어떤 나라도 이 사실 없이는 일어난 일이 없고, 따라서 인도도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려면 이 영원한 법칙을 지키지 않고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이 이 법칙에서 면제받지 못할 것도 정한 일이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재난이 올 때마다 피하기부터 하려하고, 비탄만 하지만, 죄가 무슨 죄냐? 나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평면적인 인생관을 고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기 위하여, 고식주의를 깨치기 위하여, 은둔주의를 벗어버리기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고난이라도 받아야 한다. 착한 것이 나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약아빠짐으로 타락해버린 지혜를, 중간에 생긴 종살이 버릇을 없애기 위하여, 굳센 의지가 자아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을 마비시키는 숙명철학을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고통이 있어야 한다. 장차 그는 새 역사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이 절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보다 넓은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낡은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

이 백성에게 참 종교를 주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다. 생명의 한단 더 높은 진화를 가져올 새 종교를 찾아내기 위하여, 낡은 종교의 모든 미신을 뜯어치우는 고난이 필요하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모든 계급신, 부족신, 주의신(主義神)을 다 몰아내는, 새 믿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가슴에서 모든 터부, 모든 주문, 모든 마술적인 것, 모든 신화적인 것, 모든 화복주의적(禍福主義的)인 것을 다 뽑아내는 풀무같은 엄격한 핵분열적인 고난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일어서라, 고난의 짐을 지는 자들아, 수난의 겟세마네 밤은 깊었고, 기드론 시내를 이미 건넜다.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다. 이천년 전 고난의 왕이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고난의 쓴잔을 들이키며 십자가를 향하여 냅다 달린 것 같이 우리도 이 짐을 쾌히 지고 저 목메는 마지막 여울로 가자”(전집1, p.315∼318).

함석헌의 고난사관의 공적 제시는 무교회 성서동계 모임에서의 발표(1933∼1935)로 된 것이지만 그 고난의 스스로의 체화는 바로 이 용골들녘 그가 정말 이름없는 사람의 자리에 들고서였다. 그는 이제 정말 죽을 자리로 향해 가게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완성시켜 가신다는 이 진리를 그 스스로가 발견하면서, 그가 짊어져야 하는 운명적인 짐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자신이 곧 그 고난의 역사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함석헌의 그 고난사관, 곧 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다 거짓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정말 천은(天恩)을 입는다. 역사의 마디마디에서마다 하늘은 그로 하여금 혹독스럽게 역사의 짐을 지게 한 것이다. 그가 이전에 말했던대로 그 고난은 가히 '핵분열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짐을 지운 사람,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고난의 짐을 받아 메는 사람, 그토록 큰 복이 어디있겠는가? 함석헌은 역사의 님 앞에 그렇듯 큰 은혜를 입은 이었다.


동경에서 들려온 딴 소리


함석헌이 돌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용골(龍洞) 한 언덕자락에 자리잡고 한참 농부가 되어 가는 때, 동경으로부터 전혀 생각지 않던 딴 소리가 들려왔다. 오산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평남북 출신 동경 유학생들 중, 앞으로 조선의 독립과 독립 후의 대비를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 중 특히 동경농대(東京 農大) 출신들로 아직 동경에 체류중인 몇몇 학생들, 재학중인 학생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 일에 크게 열심을 보이는 이들 중 역시 동경 농대 재학중인 김태훈이 있었다.

김태훈은 이전 오산학교 제학 중이던 때, 언제 어느때고 함석헌 선생이 반드시 들고 다니는 책이 있어, 한번은 큰 결심을 하고 “선생님, 그 책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여 그 책을 건네받아 본적이 있던 학생이었다.

어느날, 민족사를 걱정하는 2∼30명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40년 1월, 신년 하례를 겸한 자리였다.

이 모임을 주선한 김태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하는 역사의 회복'을 위한 축복의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 학기에 평양근교 송산에서 농산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김두혁 선배께서 동경 농대에 오시게 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 선배께서 송산 농산학교를 맡을 후임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자랑스런 지도자가 있습니다. 제가 그 농산학교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을 모금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이 모임을 주선하게 되었습니다.”

김태훈은 그리고는 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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