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공부하며 목회할 때다. 내가 섬기는 한인교회가 도르트문트 아이힐링호펜에 있는 독일 교회 건물을 빌려 썼다. 어느 해에 독일 교회에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는데 우리 교회도 참여했다. 거기에서 지금까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일이 있었다.

안내인이 40대 초반의 요시라는 사람이었다. 일정 중에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바셈이 있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요시가 말했다. 자신은 박물관 안에까지 들어가서 안내하지는 못한다고, 그 안에 들어가면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다. 40명 조금 못되는 우리 일행이 박물관을 다 둘러보았다. 끔찍한 유품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생체 실험을 당하며 죽는 장면, 발가벗겨진 채로 끌려가는 남편을 역시 발가벗겨진 채로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손을 붙잡고 바라보는 아내, 죽은 사람들의 이빨과 신발들, 희생당한 어린아이들에 대한 유품들 ….

독일 사람들은 대단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거의 모든 일행이 끝까지 다 보았다. 몇 사람이 도중에 나가기는 했지만.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에 올랐다. 모두 말이 없다. 버스에 타면 늘 우스갯소리를 하며 우리를 즐겁게 하던 요시도 아무 말 없이 앞자리에 앉아 있다. 15분이나 20분 정도 차가 달렸을까, 요시가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은, 복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한은 잊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자체를 잊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망각은 과거의 불행을 다시 반복하게 만듭니다.”

한 해가 간다. 매해 그런 얘기를 하지만, 올해처럼 많은 일이 있었던 해가 흔치 않다. 정치적으로 정당 정치가 불신을 당한 사건의 충격이 컸고, 경제적인 점에서 불황의 그늘이 참 짙었고 그 사안이 현재 진행형인 한미에프티에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일본발 방사능 사고는 또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가. 격변의 해라는 별명을 확실히 하려고 했는지, 연말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이제 곧 한 해가 간다. 싫든 좋든 새해가 올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구나 새로운 해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해가 바뀔 때 필요한 지혜는 지나가는 해를 털고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일들을 털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새해를 맞을 수 있다.

털어내는 게 지혜인 까닭은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다. 지난 걸 어쩌겠는가.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지난 일 때문에 안달하고 속을 끓이고 분노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한 일이다.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나 우리라는 공동체, 그리고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 할 상황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털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 사건과 사안에 대한 당시의 고통은 잊어야 하지만 거기에서 얻은 가르침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인 일에 대한 분노와 원한과 복수심은 백해무익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생긴 깨달음은 천만금보다 더 귀하다. 역사의 가르침을 망각하면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된다.

이런 얘기를 한국 교회에 대보자. 곧 지나갈 해는 한국 교회에 참 뼈아팠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면 다 안다. 마찬가지로 해보자. 다 털자. 털고 가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우리가 참 부끄러웠음을,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한 것을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뼈아픈 가르침을 결코 잊지 말자! 그래야 희망이 동터올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누가복음 1장 78절에 참 특이한 표현이 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해는 아래에서 떠오른다. 돋는 해는 아래에서 위로 솟는다. 그런데 돋는 해가 위에서 온단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돋는 해가 위로부터 내려올 수도 있다. 한국 교회와 사회에 그리고 오늘의 세계에 그런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 기도하자. 간절하게 두 손 모아 하늘 아버지 우러르며 빌자. 새해에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달라고 말이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