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을 아시나요? 이스라엘 할아버지의 여유있는 시간.

알로펜이 안토니의 어깨죽지를 나꿔챘다. 안토니의 몸은 가벼웠다. 알로펜이 모처럼 악력(握力)을 발휘했다. 안토니가 움찔 놀라더니 주춤거렸다.

“안토니, 오늘밤은 내 경고를 들어줘!”

알로펜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으나 안토니는 곧바로 토를 달지 않았다. 그도 알로펜의 감정의 흐름을 간파했는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조심스럽게 알로펜의 옆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구도자란 진지해야 하는거야. 혹시 자기가 큰 도리를 깨쳤다 싶거든 더욱 조심스러운 자세여야 한다. 하늘이 자네를 선택하고, 마니처럼 또는 예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다 해서 함부로 말놀음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안토니, 왜 말이 없나?”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요.”

“거 무슨 소리야.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거야?”

“…….”

“아직은 설익었다. 마니의 활동을 보면 24살에 수도원을 떠나 자기 길을 갔고, 예수께서도 12살 이후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성경의 기록대로 그가 공적활동을 시작한 때가 서른살 무렵이라 했다. 특히 예수의 경우 12살과 서른살 사이의 십팔여년 간이 침묵의 기간이었음에 대해서도 생각을 깊이 해봐야 하는거야. 자네가 나에게 또 하나의 수도장인 이곳으로 인도해 주어서 나의 구도행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은 내가 오래 간직하겠어요. 그러나 안토니 자네는 세상을 너무 가볍게 대하려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어. 내가 그 부분은 바로 잡아주고 싶다.”

“알겠어요. 형.”

안토니는 이전의 당돌함을 어디에 숨겨버렸는지, 전 같으면 충분히 논쟁을 하려들 터인데 그러지를 않았다. 예수 같은 사람이 되어 한 세상을 꾸려보겠노라고 껑충거리던 것이 조금 전의 그였는데 말이다.

알로펜은 안토니의 감정에 대해서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자기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일 안에 길리기아 다소(타르소)로 가서 바울 선생의 고향을 둘러보고, 크데시폰으로 가고 싶었다.

달빛이 밝지 않아 희뿌연 안개가 서린듯 했었는데 차츰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알로펜은 혼자서 천천히 걸었다. 안토니는 물론 그의 모친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나무숲 가까이로 가서 기도하는 등 자유로운 밤이었다.

다음날 교주가 알로펜을 불렀다. 안토니를 시켜서 전갈을 보냈다. 무슨 일일까? 안토니에게 사전지식을 얻고 싶었으나 참았다. 묻는 대로 답변하면 될 일이라 싶었다. 그는 혼자서 교주가 부르는 시간에 맞춰서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갔다. 큰 방안이 훵하니 비어 있었다.

“선생님, 저 알로펜이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알로펜이 거실에 들어서면서 왔노라고 밝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으나 기척이 없다. 마음이 불안했다. 그때 교주가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그래, 그래. 미안해요. 내가 뭐좀 하느라고….”

“아, 네. 괜찮습니다.”

알로펜은 교주의 안색이 평온해 보이자 안도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턱대고 찾아와서 결례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오, 아니야. 난 알로펜 처럼 삶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을 좋아해요. 목사의 길을 선택했노라 했죠?”

“네. 그렇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크데시폰에서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저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허어, 그런가? 아버지 존함이….”

“네. 네스토리안 중앙교회 압바스 감독이시죠.”

“뭐라! 압바스 감독! 그분이 아버지시라고….”

“네. 혹시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잘 알지….”

교주는 깜짝 놀라면서 알로펜의 얼굴을 거듭거듭 살피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응, 그렇지. 내가 자네를 보자한 것은 이 동산의 분위기를 적응하는가를 알고 싶어서야.”

“네, 그거라면 염려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또 저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수일내로 떠나려 합니다.”

“그래. 뭐 불편해서인가?”

“네. 크게는 아닙니다만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으나 여기 계시는 분들 중 상당수는 시간을 즐기는구나 싶기도 하더군요. 하루가 천년, 또 천년을 하루처럼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다르다 싶기도 하구요.”

“응, 그렇구먼. 잘 보았어요. 나 또한 동감이야.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기도하면서 쉬는 이들 어느 누구에게도 시간에 쫓기게 하지도 않고, 나의 판단을 그들에게 요구도 하지 않아요. 모두들 알아서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니까.”

“현명하시군요.”

“그래요. 내가 시간의 여유를 강조하는 것은 여러 개개인들이 자기 시간, 뭐 소명이라고 할까?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먼. 스스로, 전혀 억지가 없이 모든 개개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인간 공부와 하나님 공부를 해주기 바랄 뿐이지.”

“네, 그 말씀의 뜻 조금을 알듯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부친 압바스 감독께서는 자네가 여기 머물고 있는줄 아시면 기겁을 하시겠군.”

“아니, 꼭 그러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제 의사를 언제나 존중하시거든요.”

“그래, 그러시겠지. 그건 그렇고. 자네 여기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이곳 풍습을 보고 충격받았겠구먼.”

“아, 아닙니다. 인도에 가면 자이나교라는 종파가 있다더군요. 그들은 완전 나체의 몸으로 일상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발가벗은 여체를 보고도 흥분하지 않는 경지, 여인들도 마찬가지라 더군요.”

“그렇지. 그들 뿐 아니라 힌두의 구르들도 발가벗은 모습으로 구도생활을 하지. 그렇다고 여기 우리들의 도장에서 자이나교나 힌두교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야. 자네, 혹시 누구에게 들었나? 내가 엣세네파 수도자라는 말….”

“아닙니다.”

알로펜은 깜짝 놀랐다.

“하긴 지금 엣세네파가 어디 있겠나. 다 실패한 한 시대의 역사지.”

“아닙니다. 선생님. 한 번 실패에 좌절할 필요 없으시죠. 두 번 실패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네, 저는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을 위하여 엣세네파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도 외람되오나 엣세네파의 숭고한 전통 주요 부분은 본받고 싶어합니다.”

“오호,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로구먼. 참 귀한 인재로세.”

“과찬이십니다. 저는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많은 배움을 필요로 합니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교주가 알로펜을 바라보는 눈은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는 듯 했다.

“자, 오늘은 이만. 쉽게 떠난다니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세. 그리고 불편한 것이 있거든 내게 연락주게나.”

“네, 선생님.”

알로펜은 교주 엘리야의 집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들판을 거닐었다. 하늘을 우러르며, 가슴을 활짝 펴보기도 했다. 모처럼 후련한 대화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주가 엣세네파 후예라…. 알로펜은 방긋이 웃었다. 안토니 생각이 났다. 안토니가 교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주의 신앙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안토니 모친이야 가능하겠다. 그만 두자, 알아보면 뭘 하는가. 이곳의 분위기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지.

알로펜은 산골짜기 쪽으로 걸었다. 걷다보니 길이 막혀 있었다. 산을 길 삼아 넘으면 길이 되겠으나 그는 뒤돌아서서 걸었다. 들길을 걷는 데 안토니가 달려왔다.

“알로펜 형. 어머니가 찾으셔요. 어서 가보세요.”

안토니가 알로펜에게 높임말을 사용했다. 심경의 변화로구나. 거리감을 두겠다는 뜻이다. 어린 놈이 긴장을 하고 있구나. 알로펜은 혼자서 빙긋이 웃었다.

“어머님, 저를 찾으셨어요.”

“그래, 어서와요.”

알로펜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안토니 모친은 방문을 열어둔 채 자리를 권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번지고 있었다.

“알로펜, 언제쯤 떠나려고 준비하는가?”

“아니, 내가 언제 떠난다 했어요. 괜히 저를 쫓아내려고 하세요.”

“아니야. 알로펜을 따라서 나도 여기를 떠나려고 해서 그래.”

“네.”

알로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말인가? 나를 따라서 떠나다니….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