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함석헌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는 제자들(왼쪽부터 서영훈, 최진삼, 이태영 변호사 외 여러분들).

김태훈과 함석헌, 그리고 송산 농산학원

송산고등농사학원을 경영하던 김두혁이 동경농대의 진학을 위해 떠나게 되면서 송산학원을 인수해 경영할 인물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김태훈은 마치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태훈 군은 그의 친구들과는 유(類) 다른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농과대학의 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농사(農事)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품고 있는 터였다. 그는 수업 중에도 거의 주말마다 동경교외의 농촌을 찾았다. 동경농대의 그의 동우들 중에는 동경근교의 농부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 태훈은 이렇듯 학교수업과 이에 못지않은 농사의 훈련 속에서 거의 종교에 가까운 '흙의 거룩'을 체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태훈이 대학 재학 중이면서도 흙의 거룩을 경험하면 할수록 언제나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라는 두꺼운 표지의 노트를 들고 다니던 '함석헌 선생'이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졸업반이 되면서 태훈 군의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철저한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농민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면 적어도 조선 사람들이 확실하면서 튼튼한 경제생활의 자립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 농촌의 부흥으로 연결되어질 것이며,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 역사를 탈환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졸업한 이후의 귀국과, 귀국한 이후 자신의 길을 그리고 있는 이제, 김두혁의 송산농산학원의 뉴스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경에 재학 중인 오산출신 대학생들이 오늘 모임을 갖게 된 것이었다.

태훈의 머릿속엔 빼앗긴 조국과, 거룩한 '땅'과, 그리고 함석헌의 얼굴이 끝없이 교차됐다. 그 같은 그림은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의 머리, 가슴 속에 하나님께서 그려놓은 것처럼 느껴져 오는 것이었다.

태훈은 큰 한숨을 몰아 내쉰 후 오늘 모임의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 모인 분들 모두가 같은 생각인줄 압니다만 우리들이 함석헌 선생님에게서 직접 배웠고, 한 하늘 아래서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행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는 물론 오산출신이 아닌 학우들도 여러분 계십니다만 함 선생님에 대해서는 다 들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40평생 '참(The truth)' 하나를 품고 '참' 하나를 이루기 위해 싸우며 살아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정신세계, 종교사상에 대해서는 감히 안다 할 수 없겠습니다만 선생님이 우리나라, 우리 역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지켜내시기 위해 헌신해 오셨는가는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위대한 사명을 걸머지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 없겠지만, 농민의 자주, 농업의 부흥 없이 우리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때맞춰 김두혁 선생이 송산농산학원 인수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함석헌 선생님이 계십니다. 아시는 분들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지금 함 선생님은 오산모교를 사임하시고 오산동산 너머 용골(龍滑) 들녘에 위치한 조그마한 과수원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들려오는 말로는 그 농사까지도 일경들의 유무언간의 압력과 위협으로 곤경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송산농산학원을 인수하여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게 되면,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잃어버린 조선사(史)의 복원에 큰 밑돌을 놓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리들이 학업을 마치는 대로 귀국하여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미래의 꿈을 상상해 보십시오.”

태훈은 평소에 말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날 다수의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밝힌 사회자로서 밝힌 의사는 거의 일장의 연설과도 같았다.

“오늘 여기 모이신 분들은 이미 오늘 모임의 성격을 주변으로부터 전해 듣고 오신 줄 압니다. 우리가 평양의 송산농산학교를 인수하여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는 일에 금액에 구애받지 마시고 모금에 참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대로 했는데도 부족한 금액은 또 다른 루트를 통해 만들어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들이 이루어내는 이 거사는 머지않은 미래 한국의 농촌운동사에 큰 초석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태훈 군이 모금을 위한 연설을 마치고 단을 내려올 때, 참여했던 학생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를 맞았다.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할 만큼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때까지 누구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해보자” “할 수 있다” 했고, 어떤 학생은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니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세상에 없던 큰 대사(大事)를 치른 것처럼 감격해마지 않았다.


김태훈의 사신이 된 명재억(明在億) 선배


김태훈은 이 사실을 조선에 있는 또 다른 존경하는 선배에게 자세하게 알렸다. 명재억(明在億)이라는 선배로 그는 당시 숭실대학의 젊은 교수였다. 함석헌의 평양고보에서 퇴학을 당하고 두 해를 지나 오산에 편입을 했기 때문에 같은 동급생들도 제대로 공부한 학생들은 함석헌보다 몇 살씩은 어린 나이들이 많았다. 명재억 교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명재억 역시 함석헌의 사상과 그 삶의 자세에 지극한 경외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동료들, 후배들, 선배들에게까지도 거의 소명처럼 함석헌을 말했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부터 김태훈을 중심으로 오산출신들을 비롯한 상당수 동경유학생들의 부탁을 받고 감격하여 오산을 달려 올라가 함석헌에게 태훈 군의 계획을 전했다.

정말 하늘이 만든 계획이었을까? 함석헌도 이때 오산에서의 농사짓기에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대가 두어둔다면 농사꾼이 되는 것도 마다할 것 없겠는데, 시대의 흐름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당하는 고통들도 적지 않았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은 그의 성서모임에 나오는 신앙동지들, 또 그를 가까이하는 이웃들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위협 같은 것들이었다.

“오산을 떠나야 하는 것 아닐까?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인격과 타고난 교사로서의 재질을 아끼는 오산의 한 원로(元老)는 “다시 오산학교에 복직하는 것이 어떠냐? 함 선생께서 응하신다면 우리가 복직을 힘써보겠다. 학교 선생이 반드시 애국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이가 있었지만 함석헌은 아주 조용히 좌우로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그 원로의 고마움에 답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역사 선생이 조선역사는 빼앗긴 채 일본말로 일본역사를 '국사(國史)'라며 가르친다니…! 그럴 수는 없지.”

명재억 교수가 김태훈의 소식을 가지고 함석헌을 찾아온 때가 함석헌이 바로 그 같은 자기와의 씨름을 계속하는 때였다. 명재억으로부터 김태훈의 소식을 전해 듣고 한참 멍한 채로 있던 함석헌은 드디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명재억도 따라 울었다. 함석헌을 따라 울던 명재억은 떨리는 손으로 함석헌의 손을 잡았다.

“형님, 얼마나 고맙고 대견한 후배들이요, 제자들입니까? 오산 이제 딱 접고 송산으로 가시지요. 하나님께서 새 길을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자신의 손을 잡은 명재억의 손을 겹쳐 잡은 함석헌은

“내가 애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소이다. 참 미안하구려….”

“아닙니다. 짐이라니요? 형님께서 송산농산학원의 부임을 허락하셨다고 하면 일본에 있는 애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할 것입니다. 태훈 군의 부탁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함석헌 선생님의 수락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고요. 인수대금 역시 전혀 걱정 말라는 겁니다….”

“그래요, 고맙소이다. 가기로 하지요.”

이렇게 해서 함석헌은 평양송산농산학원의 교장이 된다. 함석헌이 마흔살이 되던 해였다. 함석헌이 비로소 '자신의 나라'(?)를 갖는 때였다.


또 한사람 최태사(崔泰士)


함석헌이 오산을 떠나는데 또 한 사람 고마운 이가 있었다. 최태사(崔泰士)라는 이로 함석헌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까지 고마워한 사람이다. 5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승화(昇華)'(필자주) 하는 함석헌의 성서관, 기독관, 역사관으로 인해 양인 사이에 적지 않은 종교적인 불협화음이 없지 않았지만 두 사람 서로의 그 '생명의 은인' 간의 관계는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이 그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최태사는 함석헌이 세상을 떠나고 10여 개월 후, 12월 27일 지상의 삶을 마감했다.

좀처럼 세상살이를 말하지 않는 함석헌이 최태사를 말하면서 '생명의 은인'이라고까지 표현한데는 함석헌에 대한 최태사의 뜨거운 헌신과 경애(敬愛)가 있어서였다. 함석헌과 최태사의 만남은 1922년 봄 학기에 이루어진다.

함석헌은 오산학교 4학년, 최태사는 입학생이 되어 만나게 되는데 실제로 오산학교 선후배로 학교생활을 한 것은 1992년 한 해였다. 함석헌이 1922년 오산학교 4년 졸업을 하고, 1923년 동경유학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태사가 함석헌과 함께 오산학교 학생생활을 한 것은 단 일 년이었지만 후에 최태사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함석헌은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학생으로 소문이 나있어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림만이 아니었다. 글 잘 쓰고 의젓하고 선생들까지도 여간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함석헌이 동경유학을 하게 된 것 또한 전적으로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의 추천과 도움에 의해서였는데, 그가 오산학교를 마치고 동경유학을 가기까지 이승훈과 함께한 학교생활은 6, 7개월에 불과했다. 이승훈이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3년이 훨씬 넘는 동안의 감옥살이 끝에 출감하게 되는 때가 1922년 7월이었는데, 함석헌은 다음해 봄 졸업과 동시 동경유학길에 올랐으니 이 기간은 사실 이승훈이 함석헌이 어떤 학생인가는 물론 이름마저도 기억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승훈이 함석헌을 오산을 짊어질 미래의 재목으로 점찍었다면 이로써 듣는이는 이승훈이 어떤 자세의 교육자였으며, 함석헌이 어떤 자세의 학생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어쨌든 최태사는 선배 함석헌을 눈여겨보았고 좋아하며 따랐고, 함석헌이 동경고사를 마치고 오산을 떠난 지 정확하게 5년 만에 오산에 교사로 부임해오면서 감격의 상봉, 감격의 공존(共存)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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