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17)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3) 3차 박해

3차 박해의 성격은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분위기였다. 3차 박해 기간을 AD 250년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선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1, 2, 3차라는 박해의 흐름이 일관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이기 때문에 2차와 3차는 서로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3차 시기로 분류되는 AD 202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2년 연속 박해가 이집트 지역에 집중되었고, 그 이후 등장한 알렉산더 황제를 이은 막시미누스 황제는 작심을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극심한 박해는 전임 황제 알렉산더의 비밀스러운 기독교 두둔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박해는 3년을 넘지 못하고 교회에는 부분적으로나마 평온이 찾아왔다. 상처받은 교회들이 치료와 회복의 기간을 거쳐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모이는 숫자가 늘어나고, 기독교 공동체가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른바 3차 박해로 보아야 할 제국의 승부수가 AD 250년부터 일어나서 사생결단을 보려 했다. 전국규모였다.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이 로마제국의 위협이 되었던가? 아니다. 기독교가 호랑이 콧수염을 만졌나보다. AD 250년대의 기독교는 로마제국에게 도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의 상대가 되었다.

그 증거로 우선 ① 백여년이 넘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들이 꾸준히 성장한다. ② 로마제국은 상대적으로 무기력해지고 도덕적 수준이 저하되어 갔다. ③ 제국의 체제에 기독교가 위협적 존재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황제 기간에 황제와 황제의 친인척 등에 뿌리내리는 기독교의 힘을 확인한 이후로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기독교 세력이 황제의 주변, 원로원, 무엇보다도 군부의 어느 장군(장수)이 기독교인인가에 대한 것 자체가 어려운 익명의 시대가 장기화 되고 있으니 로마제국의 정보력이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④ 기독교 조직이 워낙 치밀하고 강인해서 로마제국 내 또 하나의 제국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⑤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1) 갈리에누스 황제와 기독교 자유

AD 250년 그 이듬해까지 2년 동안 제국의 기독교는 혹독한 박해를 맛보아야 했다. 데시우스(Decius) 황제가 역대 어느 황제보다 더욱 심한 박해로 예루살렘 교구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감독 바빌라스, 로마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등이 순교했다. 데시우스의 박해 2년 차에 그는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교회는 잠시 평온을 찾았다.

이어서 갈루스가 데시우스에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전임자와 별도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잠시 후 무슨 덫에 걸린 사람처럼 박해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잠시 박해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제거되었다. 갈루스의 뒤를 이어 발레리안 황제가 그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와 부황제로 등장했다. 발레리안 황제(AD 253∼260)는 취임 초부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얼마 되지 않아서 핍박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기독교 신자들이 굴복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을 때는 목숨을 빼앗았고 아녀자들은 추방시켰다. 기독교 신자들 중 전임 황제들의 가족들일 경우에도 복종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했다. 그래도 거역할 경우에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냈다.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도자들도 여러 명 순교했고, 특히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감독도 순교했다. 발레리안 황제가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포로로 잡히므로 황제의 뒤를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승계했다.

갈리에누스는 그의 부친과는 달랐다. 그는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 칙령으로 발표했다. 사실상 그의 통치기한 40여 년 동안 제국의 기독교는 합법 종교였다. 드디어 황금시기가 찾아왔다. 지하에서 몸을 털고 도시로 나왔다. 동굴에서, 사막에서도 달려나왔다. 곳곳마다 아름다운 교회당 건축물을 짓기도 하고, 교회들을 조직화 하고 신자를 재훈련 시켰다. 제국의 신민들 중 많은 지식인들, 군인들, 경제인도, 양질의 사회구성원들이 교회를 찾아왔다.


(2) 박해자 디오클레시안

AD 303년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제위에 오른 뒤 로마는 다시 박해기로 들어갔다. 초기 몇 달 동안은 세력들이 강해진 기독교를 어떻게 다룰까를 탐색하는 시기를 가진 듯 하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모친이 이교신자였는데 그녀가 황제인 아들에게 강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그의 후임이 될 사위인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부추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명한 것은 디오클레시안은 재임 초부터 뜸을 들이다가 니코메디아에서부터 박해를 시작했다.

차츰 박해의 강도가 심해지고 교회의 성직자들은 감옥에 가두고, 이방신(로마신)에게 제물을 드리게 하는 등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였다.

①  공직자들은 자격박탈한다. ② 황제 궁 주변의 기독교 신자들은 노예로 삼는다. ③ 시민권 박탈 ④ 성직 박탈 ⑤ 로마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배교를 유도했다. 디오클레시안 박해기는 특징이 있었다. 제국의 주요 기구나 기능의 인물들, 제국의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들도 가차없이 처단했다. 특히 황제의 아내인 황후와 딸까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남편과 아버지인 황제 명령에 따라서 순교해야 했다.


(3) 박해자 갈레리우스

부황제로 임명된 갈레리우스 또한 장인인 디오클레시안 황제를 따라 자기 통치 지역에서 박해를 하였다. 그러나 갈레리우스 박해 시작 8년 째 되던 해 박해를 멈추었다. 그가 죽을 병이 들었다. 그는 기독교인 박해 중지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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