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18)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4) 박해시대의 종결

디오클레시안 황제 사위로 황위에 오른 갈레리우스는 그의 장인 황제는 물론 역대 황제들의 통치 방편이었던 기독교인 길들이기를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런 그가 통치 8년째 되어 갑자기 박해를 거두었다. 갈레리우스는 무서운 질병에 걸렸다. 종양이었다. 창자가 썩고 그 냄새가 진동하여 사람이 가까이 하기에도 힘들었다. 애꿎은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했다고 구박을 받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갈레리우스는 자기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에 대해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은총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 죄를 자백했다. 그 무렵 대담한 기독교인들이 황제가 해야 할 일을 충고하기도 했었다는 전승도 있다. 황제는 드디어 기독교인들을 '관용'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기독교인들은 서둘러 교회를 재건했다. 예배의 자유를 얻었고,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권력의 부탁을 받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관용을 발표한 이후 갈레리우스 황제의 병은 차츰 회복되었다.


(1)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AD 288년에 태어난 콘스탄티누스는 AD 306년에 제국의 서방, 곧 스페인, 영국, 프랑스 북부를 통치하는 부황제가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4명의 부황제와 1명의 정(황)제가 지역을 분담해서 통치를 했었다. AD 306년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프랑스)에 있는 그의 부친 콘스탄티우스가 중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갈레리우스의 감시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탁월한 군주의 기량이 보이자 갈레리우스가 그를 황제 궁에 붙잡아 두었다. 표면적 이유는 그의 교육환경으로는 로마가 좋다는 것이었으나 속 내용은 인질이었다.

갈레리우스의 허락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콘스탄티누스는 야반 탈출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부친이 통치하는 갈리아로 달렸다. 통신수단이기도 했던 당시 '파발마'를 조작해 가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그가 부친 앞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콘스탄티우스는 숨을 거두고, 부친의 군부 지휘관들에 의해 콘스탄티누스는 부친의 뒤를 이어 부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10년 주기로 정황제의 자리를 지명하는 관례를 따라 갈리아 지역 부황제 몫이 콘스탄티누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본토의 중심세력인 막센티우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제국은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2) 밀비안 다리의 전투
야심가 콘스탄티누스는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를 촌놈으로 여기고 있던 맥시미안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부친의 영향력을 믿고 동서방 모두의 아우구스투스를 자임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었다. 세력을 강화한 콘스탄티누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해 왔다. 역사적인 전투장, 밀비안 다리 건너편 평원에 진을 친 콘스탄티누스는 전투 전날의 시간을 고민과 갈등 속에 시달렸다.

그런데 전투 전날, 대낮에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의 머리 위에 십자가의 깃발을 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그 시간까지만해도 태양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정사를 말하면, 그의 부친과 모친이 태양신을 모시는 일로 뜻을 같이 할 수 없어서 모친 헬레나가 부친으로부터 이혼당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대낮의 붉은 태양은 무엇이고 나풀거리는 십자가 군기와 거기에 써진 '이로써 정복하라'는 글씨는 또 무엇이었을까? 부친과 모친의 합작 지원인가?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의 보여주심을 따라서 십자가 깃발을 들었다. 대전투는 밀비안 다리 건너편 평원을 누비면서 제국의 두 영웅이 불꽃을 튀겼다. 막센티우스는 전투에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하여 밀비안 다리를 미리서 파괴해 버렸는데, 이를 어찌하나! 전세가 불리했다. 퇴로가 없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강물로 뛰어들었다. 허우적거리다가 그는 부하들과 함께 티베르 강물 속에서 죽어갔다.


(3) 밀라노 칙령 반포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동맹자인 니키니우스와 함께 AD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다. 로마제국에서의 '기독교 자유령'이었다. 이는 갈레리우스의 '관용'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남긴 역사의 자료에 따라서 밀비안 다리 건너편 평원에서 대낮에 보았다는 십자가의 깃발을 우리는 좀 더 냉정한 마음으로 새김질 해 보았으면 한다. 먼저는 그의 부친이 믿고 있는 태양신, 늘 부친의 엄중한 권고가 있었을 태양신 신앙, 그리고 모친이 간직한 독실한 기독교 신앙, 그 신앙 때문에 이혼을 당한 어머니, 또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던 그 자신의 아픔까지 간직한 예수의 십자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깃발이다. 이 깃발을 앞세웠을 때 일어날 파장을 정치적 두뇌가 천재수준인 콘스탄티누스가 모르겠는가.

십자가 깃발을 걸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정적인 막센티우스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막센티우스 휘하 군사들의 사기가 어떠했을까? 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잠재력 만점은 아니어도 우승점이었을 때였다. 황제가 그 가문 모두를 동원하여 기독교 신자를 보호했던 일이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물론 원로원의 실력자이거나 용맹한 군사를 거느린 군 사령관이 예수를 믿고 있을 때였고, 또 그들 중 누군가가 황제의 자리에 밀고 올라설 수도 있는 시대에 기독교 보호는 자리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제국의 어느 실력자가 기독교 신자인지를 알 길이 없는 익명성 깊은 그 시대 로마제국은 기독교 공포증에 떨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막센티우스 자신이나 그의 군부, 또 콘스탄티누스의 부하들이 그들 자신이 휘두르고 있는 십자가의 깃발 효과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군기를 들었을 때, 결코 손해는커녕 그 힘의 폭발력으로 적진을 제압해낼 파장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전술과 전략의 명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 믿으면 된다. 별도의 해석이 없어도 3백여 년 가까이 죽음보다 무서운 핍박시대를 마감한 기독교 자유령이면 오늘은 만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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