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1)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로마 가톨릭은 욕심도 많다. 그들의 제국교회를 구분할 때 서유럽과 동유럽교회 또는 서로마와 동로마교회로 구분하는 것으로 끝내야지, 동로마교회를 동방교회로 구분하는 행위는 착오라고 정리를 해주어야 한다.

세계 일반의 표현가치로 볼 때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범주 안에서 서로마와 동로마로 구분해야지, '동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된다. 로마교회는 그들의 정통적 교리한계를 벗어나면 무조건 '동방'으로 몰아부치는데 이는 옳지 않다.

본디 초기(고대) 기독교에서는 동방을 두려워했던 듯 하다. 그 두려움은 경멸로까지 발전하여 자기들의 문화적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기독교의 '세계화'를 출발할 때 사도행전은 로마와 아시아(소아시아)로 구분을 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베소 지경)와 아나톨리아(터키 앙카라 중심지대)를 알고 있었다. 아나톨리아가 로마와 대결구도가 되는 아시아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시아를 무시했다. 아시아에게 오리엔트(Orient)라는 어정쩡한 호칭을 주었고, 서로마와 동로마를 서양과 동양의 비교상황인 것처럼 이끌어가면서 로마제국의 동방이 되어야 할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와 문화배경을 지닌 곳을 '동방'으로 대접하려들지 않고, '동교회' 지대로 어물어물 넘기려 했었다. 현재까지도 교회역사 책들을 보면 동방과 동로마를 혼돈하는 식자들이 상당수 있음을 보면 그 여파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지면에서는 동유럽과 동방의 혼돈을 바로잡고 '아시아 기독교'를 중심으로 표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방', 또는 '동교회'라 해도 이는 '아시아 기독교' 영역임을 밝혀둔다.

우리는 세계 기독교 역사 이해가 로마 가톨릭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본 지면에 연재하는 '기독교 세계사'는 '유럽과 아시아 교회사'의 중심을 별도로 하고 로마 가톨릭의 더부살이 시대를 완전히 청산하는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1. 유럽교회(로마교구)의 생각


초대 교회가 유대파 신흥교회로 대접받으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1세기를 마감하려 했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욤니아 대회(AD 90년)를 기회로 대거 유대교로부터 축출을 당하면서 예수의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비교적 로마제국과 투쟁적 자세를 취했던 로마교구는 신앙의 독자성을 지켜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공헌이 컸다.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론 앞에서 예수께 크게 꾸중을 들은 후(마 16:16, 22∼23) '예수는 누구냐'에 대한 가르침을 뼈아프게 학습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로마교구(후일 로마 가톨릭)를 지도했으니 로마교회가 정통성을 우선 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 로마교구의 눈에 바다이산, 타티안, 마르시온 같은 이들은 기독교의 엄청난 이단자들이었다.

2. 유대교에 대한 평가


유대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걱정이 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그 시간 예루살렘에는(행 1:5, 9)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었고, 그들의 거주지가 거의 사산조 페르시아 지역이고, 범 아시아권이었다.

바울사도의 경우도 1차 선교여행과 2차 여행까지는 각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나 유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3차 여행부터는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와 결별하게 된 주된 이유가 안디옥교회의 변질, 곧 헬레니즘화된 현실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페르시아권 유대교는 바벨론 포로기(BC 586년 이후)의 유대교 순수성도 지키기 어려웠다. 페르시아인들의 중심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교리적 혼합성까지 있었다.

어떤가? 유대교만으로도 예수를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또 하나의 이질적 종파인 조로아스터교까지 합세했으니 예수의 메시아 선언은 물론 신(神)이며, 인간인 양성(兩性)의 메시아를 믿고 따르는 데 쉽지 않았을 것이다.


3.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갈등


고대 페르시아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한 후, 파르티아 왕조가 잠시 지배세력이 되었다가 사산왕조 페르시아시대가(AD 225∼440년) 등장했다. 곧이어 사산니드(AD 440∼651년) 왕조기간까지 합하면 페르시아는 충분히 로마제국의 맞수가 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영토 안에서 행세하는 수리아, 앗수리아, 아르메니아, 네스토리우스의 세력들까지 견제하면서 로마교회는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 순수를 지켜내기 위하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콘스탄티누스의 천도(AD 330년) 이후


세력이 강화된 동유럽교회는 로마교구를 심각하게 괴롭혔다. 니케아회의(AD 325년)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여했던 명단을 보더라도 동로마교구(콘스탄티노풀 교회중심)가 절대 우세였었던 니케아회의 과정에서도 이단자 아리우스는 겨우 18명의 대의원을 이끌고 와서 380여명 대의원들의 교리적 요구를 뒤집으려고 했었으니 로마교구의 긴장감은 쉴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끼고 도는 친위세력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중심으로 아리우스의 단성론 기독교를 정통기독교와 혼합시켜서 제국이 하나요, 황제도 하나, 종교도 하나를 제시하여 자기 자신이 천하제일의 군주가 되고 싶었던 콘스탄티누스의 섣부른 시도가 로마교구를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로마교구는 니케아회의가 기독론을 간신히 통과시킨 후 성령론 부분이 소홀함을 발견하고, 성령론에 있어서 보충 구문을 제시했다. 니케아 삼위일체론에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온다'로 되어있으나 로마교회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되 성자를 경유한다'로 추가 보충을 하게 되었다.

성령론 싸움은 수백여년 동서 로마교회의 갈등으로 남아있다가 결국은 AD 1054년 동·서 로마교회의 결별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처럼 로마교회는 동로마교회의 순수성도 의심하는데 페르시아권 쯤이야 소 닭보듯이 했음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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