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2)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콘스탄티누스가 AD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로마제국 수도를 옮긴 후, 로마 제국교회의 기류가 다라졌다. 콘스탄티누스 주변으로 철새형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같은 조짐은 콘스탄티누스가 AD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 후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제국의 힘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遷都)한 후부터는 힘의 쏠림이 심해졌다.

그 실례로 니케아 제1차 회의(AD 325년∼) 전 과정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니케아회의 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권과 교회의 권위 사이의 구분도 못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하였고, 318명의 정통파 대의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며 18명 대의원을 가진 아라우스(단성론 이단자)파 신학을 디밀며, 기독교가 하나됨이 옳지 않겠느냐는 강압성 태도를 계속 고집했었다.

1. 니케아회의에 소극적이었던 로마교구(후일 로마 가톨릭)는 니케아회의 후 로마의 정통기독교 세력을 강화했다.


로마 교구의 특성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더 나아가서 죄인된 나와 함께 죽으신 예수에 대한 강한 집착력을 가졌었다.

2. 서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성령론 시비


황제 등극 20주년 기념을 겸하여 로마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AD 325년 오순절 무렵이니까, 6월 14일 경이었다. 황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회의장에 입장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자처럼 금은보석으로 치장한 훤칠하고 날렵한 황제, 건강미까지 자랑하면서 입장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의 원수였던 황제, 그를 야만인 취급을 했던 교회의 감독들이 황제 콘스탄티누스 앞에 읍소하는 모습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이 느껴졌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젊은이에 지나지 않은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전역에서 온 감독들 앞에서 회의 의장으로서 의사봉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살펴보면 참석 대의원 318명은 대부분 동로마 지역 감독들이다. 전체 감독들 2천여명 중 318명은 작은 숫자다. 대다수의 로마교구(서로마) 감독들은 불참했다. 황제가 감독들의 편의를 위해서 회의 참석비용 전체를 국고에서 담당했다. 감독 1명당 서기 장로 2명, 3명의 하인들의 여행비까지 배려했으나 로마교구의 불참 부분을 생각할 때 제1차 니케아회의 실태를 알 수 있다.

회의는 우여곡절(회의 내용 별도 기술)을 거쳐서 돌이켜보니 기독론 문제나 특히 성령론 시비는 끝내 서로마와 동로마 교회간에 분열하게 되는 AD 1054년의 비극으로 발전했다.

서로마교회는 동로마(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성령론이 못마땅했다. 니케아 신조에 의문을 가졌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다'는 한마디로는 빈틈이 많이 있다고 보았다. 바로 여기서 기독론에 기초한 서로마교회와 성령론을 선호하는 동로마교회의 향후 1천여 년의 비극적 역사가 시작되었다.

3. 동서로마교회와 별도의 아시아는?


세계 기독교의 성격 이해로써 동과 서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기독교 부분이고, 아시아기독교는 성령강림절부터 자기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한 번 정리하면 아시아교회는 유대교식, 아시아 종교들식, 고대 인류사에서 서유럽 보다 앞섰던 문명의 조건들이 대체로 기독교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부적합했다.

1) 유대교식
아시아 주요 지대에 흩어져 살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를 맞이할 신앙적 또는 신학적 준비에 서투를 수 있었다. 예루살렘 유대인이나 크게 다를바 없었을 터이니까. 페르시아 제국 각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의 성령 강림절 시기는 이방지역 신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활동했던 시대의 메시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기독교의 순수를 창출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 중 다수는 단성론파 기독교의 토양에 근거한 인물들이었다. 저들 중 헬라파는 대개 영지주의, 히브리파는 에비온주의로 기울었을 것이며, 임마누엘 그리스도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 페르시아 종교들과의 충돌
페르시아와 헬라의 세례(영향)를 받은 초기의 기독교 기반이 기독교의 고통이었다. 더구나 페르시아 고유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초기 기독교의 틀을 잡는 데 많은 장애를 주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인도 힌두의 쌍태아 과정을 거쳤다는 일설이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것들이 지닌 힘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2세기 말 등장한 마니교는 기독교, 페르시아, 인도의 종교들까지 끌어들인 혼합성 종교를 지향하면서 기독교의 힘을 무디게 하는 주변 효과를 내고 있었다.


3) 중국 아시아와 인도 종교의 영향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아시아행을 결심할 때가 네스토리우스 파가 아시아행을 결심하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말하면 도마파, 빌립파, 다대오파 등이 반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제국의 절반쯤 끌고 나왔다는 전설에 의하면 5세기 이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페르시아권에 진입해 오면서 아시아 기독교에게 큰 힘을 보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중앙아시아나 중국 대륙에 선교를 하면서 거대한 반(反) 기독교 사상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 본토에 들어갔을 때 중국 사상의 종교화의 모습인 도교와 선불교가 벅찬 상대였으며, 네스토리우스파에 끼어들어 동행을 해야 했던 시리아, 앗시리아파, 단성론과의 한솥밥을 먹으면서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패배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별도 지면에서 보충한다).

이처럼 아시아에서의 기독교는 벅찬 싸움을 하고, 특히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통 실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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