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스승 유영모와 함께 한 함석헌 선생. 사진 왼쪽은 당시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

유영모의 '어둠'


유영모(柳永模)는 함석헌이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까지 무릎을 꿇고 대하는 유일한 스승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선생님의 제자노릇을 해야 하는건지…”하며 답답해 하는 때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1940)나, 이제나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권위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유영모에게서 편지가 온것이다. 더군다나 이 편지는 그 달(1940년 8월) 성서조선(聖書朝鮮)에 발표되는 동시에 함석헌에게 우송된 것이었다. 〈저녁찬송〉이라는 제목의 글로 '숨 너머 편에서 쉼이 없는 숨'(영원한 숨:필자 주)을 찾으라면서 '함 형께 드리고저 한다'며 저 유명한 '어둠이 분명히 빛 보다 크다'는 선언을 담아보낸 것이다.

'어둠이 분명히 빛 보다 크다' 한 이 말은 이미 알려진대로 유영모가 1921년 9월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제 교육당국의 불허로 다음해 초겨울 또다시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유영모가 짐꾼 한 사람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고읍역으로 나가는 길에 당시 오산학교 졸업반에 재학중이었던 함석헌이 혼자서 유영모의 고읍역길을 동행하게 되어 그 동행도상에서 들려준 말이었다.

그로부터 18년 후 유영모는 함석헌이 그의 일생의 과제로 가슴에 품어온 교육과 신앙과 농사를 하나로 묶은 공동체의 실현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저녁찬송〉이라는 이름의 글을 보내온 것이다.

저녁찬송에서 유영모는 18년 전에 들려주었던 그 '어둠이 분명히 빛 보다 크다'를 풀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정치는 못하고 이때까지 왔던 문제입니다. 오늘 당하여보니 제(弟) 어둠을 스려하기 보다도 빛에 혹함이 많았던 탓이었습니다. 무사(無私)만 하고보면 암흑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빛을 기(忌)함은 사람의 것(物資)을 도적하는 자이지만 어둠을 기(忌)함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랴는 자(생명을 私有하랴는 자)입니다.”

'어둠이 분명 빛 보다 크다' 했던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유영모 자신도 자신이 했던 그 말을 '담대하게 단정치는 못하고 이때까지 왔던 문제'라고 말하는 정도였다면 그때 스승이 주는 말을 함석헌이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둠이 분명 빛 보다 크다'라고 열여덟해 전 제자 석헌에게 주었던 그 말은 이제 그 풀어밝히는 편지의 글을 통해 유영모 자신에게 주는 격려였음을 명시해준다.

'어둠이 분명 빛 보다 크다'한 그 '빛'이란 오산학교 교장의 자리, 그 자리에의 혹(惑)함을 아주 짙게 암시하는 말이었다. 유영모가 아무리 도인(道人)에 가까운 인격이라 해도 그는 이제 서른한살의 청년, 세찬 생의 설계도를 그려야 할 나이의 그에게 당대 조선의 거물들이라 할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이광수 등의 이상과 몸짓이 어울려 출렁이는 오산의 교장자리에 혹함이 없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산의 교장으로 발탁되기까지의 유영모는 세상의 학문이라는 것, 대학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같은 것들을 일탈하여 생(生)의 신비와 그 뜻에 취해 살아오는 이었다. 그런 그가 그의 고집스런(?) 삶의 방식을 접고 찾아든 오산이었다.

어떻게 그 오산(빛)에 혹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유영모는 그렇게 찾아든 오산을 교장취임식 조차 못해보고 떠나게 된 것이다. 1년을 훨씬 넘게 오산에 있는 동안 유영모는 교장인가를 기다리며 적잖은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 분명하다. 풀어 말하자면 '어둠'속에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유영모는 그의 오산학교 교장 취임이 결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벌써 교장 취임이라는 '빛' 보다 하야(下野)라는 '어둠'의 선택이 참 찾아감이라 다짐한 터였다. 유영모는 이렇듯 자신을 향한 다짐을 자신의 귀로에 동행해 주는 제자 석헌에게 내뵈인 것이다. 어둠이 분명히 빛 보다 크다!

그런데 18년 후 함석헌에게 우송되온 편지에서의 유영모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어둠을 기(忌·거부하거나 꺼림·필자 주)함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라는 자(생명을 私有하라는 자)입니다” 한 것이다. 유영모는 역사의 배후, 우주의 배후에 있는 '절대의지'를 절대로 믿었다.

자신이 살며 뚫어가야 하는, 뚫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 어둠,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를 키우기 위해 빛 보다도 어둠을 애용하신다는 사실을 오산사건을 통해서 발견이라기 보다도 체감한 것이다. 그런데 18년 후 그 유영모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어둠'을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려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40년 8월호에 실린 〈저녁찬송〉의 '함 형께 드리고자 한다'의 원문 중의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랴는 자'에 유영모 스스로 (   )를 하고, 그 괄호 안에 (생명을 私有하라는 자)라는 주(註)를 달고 있다.

왜 유영모는 어둠을 싫어하는 것, 거부하는 것, 꺼리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려는 자라 했을까? 유영모가 다시한번 함석헌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어둠으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함석헌 사상연구가 이치석은 함석헌에게 보내진 유영모의 글 '어둠이 분명 빛 보다 크다'를 두고 '그것은 마치 함석헌의 앞일을 예감하는 듯이 보였다'고 일견 '종교적 시사'를 하고 있다.

'선생님'의 편지를 받은 제자 함석헌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일본 경찰에 의해 조작된 '계우회'

'내 생의 밑돌'이라 믿고 결심하며 송산에 똬리를 틀고 선 지 이제 5∼6개월. 그 사이에도 무너진 조국 다시 찾겠다며 알게모르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오고가는 학생들, 청년들이 이어지고 있어 크게 조심을 하고 있는 터인데, '어둠이 분명히 빛 보다 크다'는 스승의 말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무슨 어둠의 사건이 닥쳐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은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에 터졌다. 일본에서 터진 사건은 함석헌의 제자들로 동경 농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계우회' 사건이라는 것이고, 안에서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졸업생들로 조직된 '장학축산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본 경찰의 손에서 한 사건으로 묶여지는데 그 접점에는 물론 함석헌이 있었다. 동경에서의 계우회사건이라는 것은 시종 일본 경찰의 조작품(操作品)이었다. 일본의 동경 경찰이 쉽게 함석헌을 배후 세력으로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그 계우회사건의 주모자로 지적된 학생들 중에 금년 졸업예정인 김태훈이 있어서였다.

처음에는 재일(在日) 한국 유학생들의 반일집회 정도로 문제를 만들어 내려했던 것인데, 조작수사를 해가던중 주동자인 김태훈의 함석헌의 송산 농산학원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같은때 한국의 평양에서 '장학축산계'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 역시 함석헌이 그 배후의 세력으로 밝혀지면서 동경의 형사대가 평양으로 급파되는 현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동경에서의 계우회사건은 순수한 친교모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평소에 한국의 정신 지도자로 함석헌을 존경하던 김태훈과 김은하의 졸업축하를 위해 열었던 동경 농대 한인졸업생 환송회가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환송회에서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함석헌이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 터져 나왔고, 졸업하게 되는 선배들에 대한 환송의 노래, 환송의 시, 환송사가 이어지면서 가슴들을 풀어가는데, 갑자기 환송회에 임석한 일본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격한 음성으로 이후부터는 환송회의 모든 순서를 일본말로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환송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고분고분, 수굿수굿 따를리가 없었다. 오늘 모임에 책임이 있는 김태훈과 김은하는 더군다나 그랬다. '조선 사람이 조선말도 못한단 말이냐?' 하고 달려들었지만 그 말이 오히려 탈이 되었다. 이미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이 아니였었으니….

즉석에서 환송회의 주빈이었던 김태훈과 김은하는 이끌려갔고, 3년씩의 감옥살이를 해야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계우회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오산출신 10여 명을 비롯, 4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한 후, '계우회가 주동하여 송산농산학원을 중심으로 조선 농민을 계몽시켜 농민폭동 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고 사건을 마무리하고, 조선 평양경찰서에 함석헌을 체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한국 학생들의 비밀결사 '축산장학회'

함석헌을 체포하기 위해 일본 동경 경찰의 특수부 형사가 평양에 급파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장학축산계사건'이 발생한다. 함석헌이 송산학원에 자리를 잡자마자 열심히 함석헌을 찾아와 조국의 독립과 자주의 길을 의논하며, 가르침을 받는 젊은이들 중 평양의 숭인상업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서로 뜻을 같이하며, 나라를 건지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을 맹세하고, 이런 계획들을 담아 함석헌과 부지런히 서신 왕래를 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찰들에게 그것은 분명히 '비밀결사'라 할만한 것이었다. 동경에서 특파된 일본 형사들의 지휘하에 평양경찰서 형사들은 송산농산학원은 물론 함석헌의 사택까지 물샐틈이 없을만큼 수색을 했다. 수색하여 압수한 물건을 그대로 평양경찰서로 수송해 갔고, 휴지조각 하나 예외없이 조사를 하던 중, 아, 그 숭인상업 학생들이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된 것이다. 더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함석헌은 체포되어 평양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장학축산계'의 여섯명의 학생들도 체포, 투옥되어 2년반씩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함석헌이 유영모가 예언처럼 전했던 그 '어둠이 빛 보다 크다'는 말이 함석헌에게 전해진 것이 8월(1940년) 말경이었는데, 그 몇일 후 9월 초 어느날 일본 경찰에 이끌려 송산을 떠나게 된다. 함석헌이 송산을 떠난다는 것은 일본 경찰에게 당하게 되는 연행, 투옥, 옥살이 만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일체의 정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기조(基調) '고난'

유영모의 그 글 속의 '어둠'이란 이후 이어질 함석헌의 어둠을 정녕 예언한 것일까? 그러나 그런 함석헌에게 기이하다 하리만큼의 새 빛이 온다. 유영모가 빛 보다 크다했던 그 어둠이 함석헌에게 빛으로 오는 것이었다. 빛이 큰 것인가? 어둠이 큰 것인가?를 넘어 도대체 고난(苦難)이라는 묘사(妙辭)가 역사의 기조(基調)가 되오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고난'이 '역사의 기조'라는 생각이 아닌 확신에 잡힌 것은 이미 10여년 전부터였다. '그러나 이제 함석헌은 역사의 기조인 고난을 몸으로 말해야 하는 때가 오고 있다'는 영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거나 사람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체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순간, 순간 온 몸이 떨려오는가 하면, 천하의 어느 한 소리도 없는 무한 고요속에 들기도 하고, 새 세계 있는 것도 같고, 새 종교가 있는 것도 같은 세상과는 전혀 딴곳에 든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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