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4)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정통은 성처녀 마리아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메시아 예수를 탄생시킨다. 출생과 동시에 헤롯왕의 살해 음모를 피해서 이집트 피난 이후 30여세에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는 3년 활동을 끝으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정을 밟는다. 그해 오순절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난해성 교훈을 교리로 내세우면서 오랜날동안 사단의 세계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사단의 1차 전술과 전략은 하나님이 성육(Incarnation)을 방해했고, 성육하신 하나님의 세상에 오심을 적극 방해했으며, 결국은 세상의 방법으로 그를 죽여서 십자가에 매달았고, 결국은 무덤에 깊이 묻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이를 무덤에 3일 이상은 가둘 수 없었고, 하나님이신 메시아 예수는 무덤과 죽음을 비웃듯이 무시하고 역사 위에 재등장하였고, 그 증거는 동행하신 성령 하나님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통신학과 신앙을 거부하고 반역을 시도하는 사탄은 여러 방법으로 정통을 견제하는 비정통 신학으로 하나님의 발걸음을 차단해왔다. 그것의 총체적 사상을 영지주의라 한다. 그 영지주의는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을 말하는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고, 그 이름을 자칭할 수 없다고 일어난 세력들을 비정통으로 계열화되었다.

정통과 비정통은 교리사나 교리학에서 잘 정리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쉽게 기독교 성장과정에서 정통 신학과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발, 반역으로까지 하면서 기독교에 위해를 가하는 세력들의 대강을 살펴보는 것이 현재의 시간이다.


1. 영지주의(Gnocticism)와 유대주의


1)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천적

앞부분에서 영지주의 내면을 말했으나 좀 더 추가하면 교활한 헬라사상 중심으로 무장하여 기독교의 메시아를 원인 무효화 하려든다. 영지주의는 조로아스터교, 동양적 신비주의 유대주의, 알렉산드리아 헬라학파, 수리아 학파 등 매우 다양하고 현학적이다.

그들의 교활함이 얼마나 지독한지 바울사상에 까지 침투하여 바울을 영지주의 중간 시조라고 하여 물귀신 전략을 시도하였고, 알렉산드리아 학파 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오리겐 까지는 물론, 앞서 언급한 마르시온, 에뎃사의 바다이산, 앗수리아의 파티안, 특히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적 사상으로 적 그리스도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바로 저들 영지주의가 한결 세련된 모습으로 정통 기독교를 21세기 현재까지 혼돈으로 몰아가는 아리우스파는 무서운 반(反) 기독교 세력이 되고 있다.

이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상(代讀思想)을 배격하는 총체적 사상으로 결국은 기독교를 불교나 이슬람, 또는 사상성으로는 공·노자, 소크라테스 등 세속 종교와 사상의 범주로 몰고가는 범신론적이고 세속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령한 세계와 물질세계의 창조주는 각기 다르다는 다신론, 이원론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2) 유대교의 불행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신과 사상, 그 오랜 사상적 배경이 초기 기독교와 단절되면서 하나의 공동체여야 할 유대교와 기독교의 상호배반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비극의 출발이 되었다.

2. 이단 못될 이단들


1) 몬타너스파(Montanist)

몬타너스파는 몬타너스가 영지주의 등 이교·이단사상을 견제하려는 뜻으로 일으킨 사상운동이었다. 그는 지식보다는 신앙, 그리스도인의 도덕성 회복, 교회조직 속에서 계급이 형성되는 것을 반대하여 일으킨 순수에 기초해 있다.

그는 2세기에 등장한 개혁사상과 청교도 운동을 시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자시이 스스로 개혁자요, 예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출신 또는 학업과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한때는 이교의 사제였다고 전해진다.
몬타너스는 AD 160년경 소아시아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으나 곧, 이단규정을 받으며 사라져 갔다.

몬타너스의 강력한 지원자 중 한 사람인 라틴학파의 터틀리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몬타너스파의 주요 주장은 ① 모든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한다. ② 성령의 은사를 존중한다. 특히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였다. 환상과 방언을 중요시했다. ③ 천년왕국 ④ 예수의 재림 ⑤ 예언 은사의 우위성 ⑥ 만인제사장 사상을 앞세우는 것과 인위적 교회조직을 거부했다. ⑦ 영적 귀족주의, 즉 몬타너스파가 아닌 경우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⑧ 금욕주의로 두번 회개를 금하고 재혼을 금했다. 그들은 지나친 열광주의로 너무 일찍 기독교 개혁을 시도했던 미완의 사상체계였다.

2) 몬타너스 승계자 노바티안

노바티안(Novatian)은 몬타너스 계승자로서 유능한 문필가요, 신학자였다. 노바티안은 헬라어 사용 경향이 우세하던 시대에 라틴어를 최초로 사용한 학자였다. 노바티안의 신학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사람이라는 기독론을 주장했다.

당시는 참혹한 박해시대로써 로마의 동방이나 서방교회 모두 어느 정도는 박해시대의 변절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나 그는 몬타너스처럼 변절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노바티안은 몬타너스처럼 로마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

3) 도나투스파(Donatianism)

도나투스는 4세기 초 몬타누스 노바티안과 함께 청교도적이고, '교회의 순결'을 주장하고 교회의 모든 규범을 엄격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끊임없는 박해에 지쳐있었다. 특히 성령을 소중하게 섬기지 못하여 이단자나 적그리스도 세력들에게 유익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활동지인 카테지의 감독들은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거나 성경을 소홀히 취급하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여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도나투스는 정열적이고 웅변에 능한 인물로 군중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세력이 확장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나서서 도나투스파를 이단 규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고, 도나투스파는 계속 확산되어 갔으며, AD 330년 경에는 로마의 감독들 중 270여 명이나 도나투스를 지지하였다.

후일, 어거스틴이 나서서 정통교회 안으로 도나투스파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도나투스파는 7세기 이슬람 세력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도나투스파는 ① 교회의 순결 ② 세속적 교역자 배격 ③ 교회에 대한 권력간섭 배격 ④ 감독정치 ⑤ 세례식은 구원의 기초 ⑥ 유아세례 ⑦ 그러나 열광적인 광신적 자세가 시비를 불렀다.

몬타너스, 노바티안, 도나투스파는 2세기 중반에서 4세기까지 순결한 성격과 교리적 정통성을 지켜 로마 가톨릭이 결국 그들의 신앙과 교리, 특히 수도원 운동의 기초를 저들 3개 파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다만 가톨릭이 저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몬타너스, 노바티안, 도나투스가 로마교회를 더 이상 감동시키지 못하여 중세 로마 기독교의 암흑이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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