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5)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라틴학파의 큰 인물인 터툴리안의 신학과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개종한 씨프리안(Cyprian)이 그 사람이다. 씨프리안은 북아프리카 카테지에서 부유한 로마의 관원을 아버지로 하여 AD 185∼200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헬라의 교육을 받으며 문학, 수사학, 법률, 행정의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중년기에 이르러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는데 개종하게 된 동기는 터툴리안의 저서를 공부하면서였고, 또 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경건한 그리스도교 장로 캐시릴우스의 영향으로 성서 탐구에 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은 후 그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구도자가 되어 독신으로 지내기로 맹세했다. 그는 46세에 세례를 받고,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장로가 되고, 곧 이어서 카테지의 감독이 되었다. 대단히 빠른 성장이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의 교회가 얼마나 로마와 헬라 앞에서 무기력하고 비굴했으면 세례받은지 1년만에 명문 카테지의 감독이 되었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씨프리안은 감독이 된 후 10여 년 동안 온갖 정력을 다하여 교회를 섬겼고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의 어려운 형편에서 그의 유능한 행정능력이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또한 살아야 할 길과 죽어야 할 자리를 아는 인물이었다. 당시의 풍조 중에 맹목에 가까운 '순교놀이'가 일부 생각이 적은 사람들에게서 유행되던 때였다. 능히 피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의 길을 재촉하는 경향 말이다. 씨프리안은 주 예수께서도 피할 때는 피하셨다고 하여 몸을 피하여 그가 명예롭게 죽어야 할 날을 기다리며 은신처에서 장로, 집사, 일반 신도들에게 서신을 보내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켜 참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한 박해기간 2년을 피해 있다가 AD 251년 카테지로 돌아와서 박해 중에 믿음을 지킨 자들을 칭송하고, 박해시에 믿음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용서하되 일정한 기간을 참회하는 기간으로 주었다. 그는 데시안의 박해가 끝나고 다시 6년 후 발레리안의 박해가 시작되기까지 교회 정치와 감독제도의 확립을 위해서 노력했으며, AD 258년 발레리안 총독의 호출에도 불구하고 카테지를 지켰다. 그 후 “나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경배 드리노라”고 말하여 황제예배를 거부하며 수많은 신도들 앞에서 믿는 자의 의연함을 보였다.

1. 독립교회 제도의 몰락


씨프리안의 학문과 덕망, 조직과 행정력은 라틴교회 즉 서방교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다. 그것은 로마교회로서는 다행한 일이었으나 순수한 교회 공동체가 무너졌다고 하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도시대의 교회는 집사, 장로, 목사, 감독의 제도가 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 교회의 자치적인 기능과 그 능력을 어느 누구, 어느 교회가 감독하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교부 익나티우스 때에 와서 감독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가 팽창하면서 교회의 행정과 지휘책임의 일원화를 통한 효율적인 운영과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단심문, 표준신앙 확립과 성경해석 등을 위하여 체계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츰 지방감독과 도시 감독의 차등, 그리고 수도에 있는 감독을 대감독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감독교구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었고 이들 교구의 감독을 대감독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감독의 권위는 막강해졌다. 교회를 세우려면 감독이 있어야 하고, 감독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성도들의 단체라는 사도시대 이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었다. 교회란 공교회, 즉 가톨릭교회 뿐이었다. 그 밖의 집단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집단체라 할지라도 교회가 될 수 없었다. 교회가 되려면 감독이 있어야 하고, 감독은 공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모든 교회의 기능은 교구감독의 권한 아래 두었으며, 구원은 감독이 있는 교회에만 있다고 하였다.

또 성령께서는 감독교회 즉 가톨릭에만 계신다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이로써 사도 이후 계속되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적으로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 성직자에게만 제사장 직분이 있다는 사상으로 변하고,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감독에게 속한 신자들의 단체로서의 교회로 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적임재로서의 교회, 즉 성령이 함께 하시는 신령한 교회로서의 형태를 상실하게 된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이는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유대 예루살렘의 제사 공동체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성취한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 어느 만큼의 비극을 가져왔는지는 진행되는 내용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닌 로마의 부활


드넓은 헬라의 바다에서 좌초한 로마의 그리스도는 부득이 로마의 배를 타게된다. 감독 정치의 기틀을 만든 씨프리안, 그가 활동하던 AD 250년대의 전후 역사를 우리는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씨프리안의 행동을 지켜봐야 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격과 인격을 가졌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3. 씨프리안의 교회관


씨프리안의 교회관은 ①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 밖에 없다. ②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이 교회에 속해야 한다. 이 교회(가톨릭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 ③ 교회는 감독과 감독들의 행위 범위 안에 있다. ④ 감독들은 사도들이 계승자이다. ⑤ 교회는 유일하고 공동적(가톨릭)이니 곧 세계적인 기관이다. ⑥ 감독들이 단합하여야 교회가 단합된다. ⑦ 모든 감독들은 동등한 지위에 있다. 그러나 사도 중에서 베드로가 사도적 권위를 맨 처음 받았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설립한 로마교회가 모든 가톨릭 교회의 모체이다. ⑧ 감독들을 배반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다. ⑨ 성직자는 제사장이다.

이상이 씨프리안의 주장이다. 이것이 곧 로마 가톨릭의 조직의 기틀이 되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제한을 받거나 때로는 중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 라틴계 학자나 라틴계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신령한 세계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위격의 존엄과 자유로운 임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저들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결정적인 배신을 했다. 저들 라틴계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세계에는 소경이 되어 사도의 계승자라는 감독에게 복종하는 척하여 위선적인 질서를 만들어 냈다.

저희들은 일찍이 하나님이 버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얽어매는 사슬로 쓰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권능의 시대가 아닌 레위지파의 제사장 제도의 부활이었다. 저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로 환원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통곡이 여기에 있다. 조금은 서툴렀지만 그래도 신실한 믿음의 계승자인 몬타누스, 노바티안과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터툴리안, 바로 터툴리안을 사부로 생각했던 씨프리안에 의해서 그들 교회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부활하게 되었다.

신령한 세계, 신령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모르는 씨프리안의 교회, 가톨릭이라는 이름의 가이사(Casesar)의 교회는 전체주의로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은 앞으로 1천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또 전체주의라는 악마를 잉태하는 태반이 될 것이다. 씨프리안의 감독제도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감독 중에서 대감독이 나오고, 대감독은 더 좋은 이름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나 씨프리안은 황제에 못지 않은 교황이라는 일곱층짜리 금관을 쓰는 인물을 만들어 냈다.

씨프리안의 교황은 ① 모든 감독의 우위에 있다. ② 오류가 없다. ③ 그리스도의 대리자 ④ 절대 권위자였다. 드디어 가이사가 교회의 옷을 입었다. 또 가이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로마 황제는 로마를 통치하지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로마도 세계를 통치하는 길을 열었다. 로마의 행정 단위와 교황권의 교권 단위를 비교해 볼까. 로마의 지방장관의 자리에 감독이 있고, 총독의 자리에 대감독이 있고, 황제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자리인 총독의 자리에는 총주교가 있고, 로마의 추밀원회의와 총주교(추기경)회의 이상인 황제의 자리는 교황의 자리이다.

이로써 씨프리안의 교회제도는 후에 씨프리안보다 더 막강한 조직을 그레고리 1세가 이루지만 로마제도의 모방이며 모방인 것이 드러났다.  이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와 살인교회, 신인공동체로서의 교회, 주님만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는 먼 훗날의 또 다른 부활의 아침을 기다릴 것이다. 골고다 언덕의 예수 무덤은 3일 만에 부활했지만 그는 어디론가 떠나신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베드로가 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침묵! 여전히 침묵하시며 떠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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