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27)]


한평생 함석헌 선생과 함께 한 최진삼 장로(왼쪽에서 세번째).

세상일을 다 벗고

평양대동 경찰서에 수감된지 두어달쯤 될 때부터 함석헌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리 눈물을 쏟는 때가 많아졌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딱히 그 자신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이 땅에서의 일'은 끝났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사람, 생각으로 하는 사람 노릇이야 이후에도 '더욱 깊이, 더욱 높이, 더욱 뜨겁게, 더욱 참되게 계속 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적어도 크다 작다, 잘됐다 못됐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묘사되는 따위의 일들은 더이상 그 자신에게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 그래서 '이 땅에서의 일'은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함석헌에겐 '한 삶'만 가능하게 된다. 절대의지(絶對意志), 궁극적 실존, 궁극적 실제자에게 붙잡힌 자로서의 삶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그려져 오는 이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전신이 후들거리도록 감격스러워 오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드디어 송산 농사학원의 폐교를 단행(?)한다. 학교에 소식을 보내 학생들을 모두 귀가 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다.

“송산 농사학원은 소위 내 운동이라 할만한 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그 자신이 말한 바 있는 그 자신의 몸뚱이 같은 운동체였다. 그런 그에게 그를 감옥으로 끌어온 이로부터 전혀 다른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석헌아, 이제 이 땅에서의 네 일은 끝났다”라는. 설움과 환희가 뒤섞여 밀려든다. 함석헌은 설움에 겨워울고, 환희에 어쩔줄을 몰라한다. 설움이란 이제까지 죽기로 싸우며 세워온 삶의 성(城)이 처절하게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에서, 환희란 '나는 이제 이 땅의 일이 끝났으니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확신에서였다.

하늘은 이후 함석헌이 걸어야 할 새 길을 준비하려는듯 11월 5일, 그의 아버지 함형택을 불러간다. 그렇듯 개인살림에 초연한 함석헌이었지만 그런 그가 아버지에게만은 끔찍하리 만큼의 효자였다. 평양대동 경찰서에 투옥될 때까지 병중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지킨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평북 선천 옥호동 약수터에서 가료중이었는데,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가게 된 함석헌은 훗날 '쏟아지는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킨채 아버지를 떠나야 했었다'고 했다.

하늘이 아버지 함형택을 부른 것은 거칠 것이 없도록 함석헌을 쓰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함형택이 살아있었다면 이후 함석헌은 그가 표현한대로 '흙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인생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날 유치장에서의 함석헌은 함께 감방살이를 하던 한 노인으로부터 시(詩) 한 수를 얻어듣게 된다. 그 노인은 함석헌의 사람 크기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드리는 것이외다'하면서 들려주는데, 이 역시 함석헌의 전신을 떨게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정한론(征韓論)자였던 시이고, 다까모리의 시로,


獄中辛酸志始堅(옥중신산지시견)
丈夫玉碎蓋瓦全(장부옥취개와전)
我家遺法人知否(아가유법인지부)
不用子孫買美田(불용자손매미전)


옥중에서 쓰고 신맛을 겪으니 뜻이 비로소 굳어진다.
장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개와 같이 옹글기를 바라겠느냐
사람들아 우리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는냐
새끼들 위해 좋은 밭 사줄줄 모르는 것을



함석헌은 이 시를 읊어주는 노인에게 더없는 경의를 드렸다. '이 땅에서의 일'이 끝난 것이라는 자각이 오면서, 그래도 여전히 허한 가슴인데 하나님이 이 獄中辛酸志始堅을 읊어주는 노인을 통해 그 빈 가슴을 채워주는 듯 느껴져서였다.

그랬다. 그 노인이 읊은 시이고 다가모리의 시는 자신으로 하여금 영원히 '새끼들을 위해 좋은 밭 사줄줄 모르는 이'로 살 것을 명하는 하늘의 말씀으로 가슴을 치고 들었다. 옥중에서 시작된 신비의 체험. 그러면서 함석헌은 자신도 모르는새 하늘에 들었다. 크기도 작기도 없이, 밝기도 어둡기도 없이 그져 온통 열려진 하늘! 정말 그것은 이상한 체험이었다.

'이 땅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자각이 오면서 함석헌은 신비한 체험을 거듭거듭 하게 된다. 그것은 이 현실 세계의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하는, 이 현실 세계의 힘이라는 것에 신명을 걸고 맞서야 하는 함석헌에게 하늘이 주는 일말의 위로였을까?

예컨데 함께 갇혀있는 옥중의 동료에게 '오늘 당신 집에서 면회 올 것이요' 하면 정말 면회를 온다던가, '오늘 당신 좋은 일이 있겠소' 하면 그가 정말 출소를 하게 된다던가, 고열에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사경에 든 이에게 손을 얹어 조용히 기도해 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깨끗히 낫게 된다든가 하는 일이 너무 자주 있었다. 그런데 함석헌에게 있어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체험 후 그는 곧 고요한 기도속에 들어 그같은 기이한 일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구했다는 것이다. 신비스러운 것들을 거부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직 하나, 참의 사람이었다. 다음해 1941년은 함석헌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특별한 기간이었다. 첫째는 '내 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했던 송산 농사학원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 세상의 일'을 끝나게 했다는 데서요, 둘째는 오직 '위 만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다는 데서이다. 그랬다. 소위 계우회 사건으로 함석헌을 수감했던 평양대동 경찰서 유치장은 함석헌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곳이었다.

이제 그에겐 방황하는 삶이 없게 되었다. 자기 길이 따로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자유인! 이제는 국경도, 국가주의도, 어떤 소유의 죄된 철학도 함석헌에겐 무관한 것들이었다.


함석헌의 첫 씨알 최진삼(催鎭三)

함석헌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이미 폐교돼버린 농사학원을 홀로 지키는 열일곱살 된 최진삼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덕천공립중견 농업학교 2년을 마치고, 함석헌이 송산 농사학원을 맡으면서 입학을 해온 학생이었다. 그는 그의 육촌형이 되는 이의 일도 배울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소개로 송산 농사학원을 찾게 되었다.

최진삼은 그저 우직하기만 한 학생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벼운 말투나 자기 자랑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묵묵, 그래서 타인들에겐 거의 바보처럼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감옥에 있는 동안도 최진삼은 그 자세가 한결 같았다. 최진삼이 송산 농사학원 학생이 된 지 채 6개월이 못되어 학교 폐교령이 내려 20여 명이 채 못되던 학생들이 다 짐을 싸가지고 돌아간 후에도 최진삼은 여전히 학교를 지키는 것이었다.

열일곱살 최진삼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송산학원의 교장이 되어 갔다. 뿐만 아니었다. 함석헌 본가에도 열심히 출입하며 가사를 돕는가 하더니 누구의 요청도 없이 이제는 가장(?)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함석헌 출감한 후에도 최진삼은 여전히 함석헌의 가족으로 살아갔다. 출소한 함석헌이 평양의 송산을 떠나 다시 고향인 용암포로 온 식구가 귀향하게 되는 때에도 역시 최진삼은 앞장서 갔다.

최진삼의 함석헌과의 이같은 이신동심(二身同心)의 생활은 그 이후 50여 년 간 이어진다. 함석헌의 끝임없이 이어지는 투옥, 그 옥중생활은 최진삼으로 하여금 함석헌의 가정과 가족을 더욱 정성을 기울여 섬기게 했다. 최진삼! 그는 학자도 아니고, 종교가도 아니었다. 변사도, 율사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함석헌이 그의 평생을 바쳐 드디어 찾아낸 첫 '씨알'이었다.

최진삼은 1947년 3월 17일 함석헌의 월남길에 길잡이였고, 그 자신도 후에 월남하게 되는데, 월남한 후 역시 누구의 추천도 허락도 없이 함석헌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된다. 함석헌의 하나님으로 그의 하나님을 삼았고, 함석헌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삼았다.

해방 직후 함석헌이 평북 임시 자치위원회 교육부장직에 있을 때 신의주학생 사건이 문제가 되어 다시 50일, 30일 두 차례에 걸쳐 감옥생활을 하게 될 때 그는 거의 희생적인 자세로 함석헌의 가정을 돌보았고, '젊은 놈이 왜 반 국가적인 인사의 집에 있느냐'며 경찰서에 끌려가 3일 동안 조사를 받기도 했고, 그 이전 '성서조선' 사건 때는 한달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월남한 이후 역시 최진삼은 꼭 같은 자세로 함석헌을 섬겼다.

함석헌이 1947년 월남하면서 곧바로 서울에서 '성서모임'을 갖게 되면서 수십여년간,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와 군사반란에 맞서 불휴의 성전(聖戰)을 전개하던 때, 그의 주변에 걸출한 지도층의 정치인들, 법조인들, 학자들이 진을 칠 때에도 최진삼은 그 자신 그대로 함석헌 곁에 있었다.

최진삼, 함석헌의 사위가 되다

최진삼이 그렇게 함석헌을 섬기고 꼭 10년째 되던 1949년 10월, 그는 함석헌의 셋째딸 은자 양을 아내로 맞게 된다. 최진삼은 1991년 해동문화사에서 발행한 〈나의 스승 함석헌〉의 '선생님 곁에서 50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만나뵌 후부터 내가 주일 학교에서부터 배운 신앙이 많이 변해 하나님의 또다른 면을 발견했고, 소원기도의 내용도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과 함께 가족처럼 살았지만 사위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그때 선생님의 가르침도 수도사적인 분위기였지만, 나의 생각도 결혼을 일종의 타락으로 보던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최진삼이 어쨌든 함석헌의 사위가 되었다. 함석헌을 말할 때 최진삼을 빼놓을 수 없고, 최진삼을 말할 때 그의 결혼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결혼식은 장장 다섯 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

유영모를 비롯해, 유달영, 송두용, 송석도 그리고 장인이 되는 함석헌까지 주례사, 축사, 권면 등의 이름으로 많은 말들을 쏟아놓았다. 대부분의 하객들은 식순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특별한 경우의 출입들, 사사로이 오고가는 일들이 가능했지만 신랑 신부는 다섯 시간 동안 꼼짝할 수 없이 견디어내야 했다.

그러나 최진삼은 이 결혼식에서 함석헌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된다. 10년 동안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섬겨 살이가 일순에 보상을 받는 것 같은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그 특별한 선물이란 함석헌이 특히 최진삼에게 들려주는 축사같은 것이었는데, '조류계(鳥類界)의 왕이 된 잽새' 이야기였다.

“새들이 모여 자기들도 왕을 뽑자고 했다. 왕으로 뽑힐 자격은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를 맨 먼저 보는 것으로 하자 했다. 세상에 온갖 새가 다 모여들었다. 특히 큰 새들, 힘센 새들, 부리 발톱이 날카로운 새들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그중에 정말 작은 새 잽새가 있었다. 잽새들은 앞자리들이 겁이 났다. 자칫 잘못했다간 몸뚱이마저도 남아날 것 같지 않았서였다. 해서 아예 맨 뒤 죽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앞의 큰 새들에게 정말 큰일이 벌어졌다. 동녘의 해를 먼저 보려고 달려들어 온 새떼들이 피투성이가 돼버린 것이다. 서로 왕이 되자는 야욕에 빚어진 싸움 때문이었다. 그때 맨 뒷자리에 있던 잽새란 놈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나는 봤다. 내가 동녘에 솟는 해를 처음 봤다.' 그래서 잽새가 새들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거다.”

최진삼은 함석헌의 이야기를 넘치도록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잽새인 것은 사실이지. 그런데 그런 내가….”
오히려 최진삼은 함석헌의 그 잽새의 이야기가 '씨알이 역사의 주체'라는 말로 돼새겨져 오는 것이었다. '그 잽새야 말로 씨알의 전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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