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7)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역사 기록상 네스토리우스 제자들이 AD 451년 에뎃사를 출발하여 아시아 선교를 시작한 후 그들의 선교가 바그다드로 일단 철수 했던 AD 1409년까지 1천여 년 정도 아시아 선교에 맹렬한 투혼을 발휘 한 역사가 묻혀버린 채 세월이 흐르고 있다. 왜,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 추방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버렸을까?


1.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교리시비를 위한 에베소 회의


제 3차 국제회의(AD 431년)가 지금의 터키 에베소 마리아 예배당에서 열렸다. 알렉산드리아 교구 대주교인 키릴루스(AD 444년)가 고소자요 콘스탄티노플 교구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피고소자였다. 그 해 6월 회의 예정일이 5일이나 지났는데 네스토리우스파 대의원(감독)들이 회의장실에 오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은 상대적으로 아시아 저 멀리에서까지 교구가 형성되어있기에 5세기 초 문명수단으로는 동일 동시에 집단이 모이기는 쉽지 않았다.

회의 장소에는 키릴루스파 대의원 150명 정도만 모여 있었다. 당시 전체 대의원은 각 교구 감독으로 1000여 명 가까운데 150명이 모인 정도는 지극히 작은 숫자였다. 그런데 키릴루스는 자파 대의원들만을 가지고 비상 회의를 열어서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는 이단자요 하나님의 원수다'라고 결의했다.

그리고 당시 자파인 에베소 교구 감독 멤논 휘하의 신자들을 동원하여 시민들에게 이 내용을 전했다. 에베소 교회 신자들은 그날 밤 횃불을 들고 무리지어 온 시내를 다니면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이다, 네스토리우스를 옹호하는 자들도 이단, 이들 모두는 하나님과 교회의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고발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정죄 추방을 받게 되는 그때의 이단시비의 배경에는 고소자 키릴루스가 아니라 서로마 교구(오늘의 가톨릭 교황청)가 있었기에 이는 동·서로마 제국 기독교 간의 돌이키기 어려운 사건이 되고 말았다.

키릴루스는 고소자라지만 고소자가 (국제)회의 의장이 될 수 없고, 150명의 대의원은 과반수의 과반수도 되지 않는 숫자로서 이 회의는 불법이었으나 정치 기술이 탁월한 키릴루스는 돈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동원한 금은보화는 오늘의 계산법으로 300만 달러(USD)정도의 액수가 된다니 그가 황제를 비롯한 행정 또는 실력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뇌물을 뿌렸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2.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이 된 이유


네스토리우스는 학자요 설교자로서 안디옥파를 대표한다. 그런데 니케아 회의(AD 325년) 이후 니케아 신조에 대하여 로마교구와 범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견해가 달랐다. 그들은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미묘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니케아 회의의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에 대한 설명부족을 이유로 로마교구는 성령론을 보완 수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은 하나님께로써 나오시되 성자를 경유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를 위반한다는 이유로 동로마 교구의 압력을 받으면서 논리적으로 밀리던 로마 교구는 대반전의 출구를 찾고 있던 차에 네스토리우스가 걸려들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로마교구(후일 교황파)에 논리적 대응으로 하나님이 어머니가 있다고 하면 유일신 하나님을 말 할 때 뭔가 이상하지 않겠느냐면서 마리아의 '그리스도의 어머니론'을 들고 나왔다. 바로 여기서 의심을 받은 네스토리우스는 정적들로부터 정밀 추적을 받았다. 그의 설교문 속에서 허점이 발견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예수는 신성과 인성의 중심에 계시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신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또 어떤 경우는 인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설명을 했다. 이 내용은 오늘의 발전된 논리체계로서는 '상황제시'로 해결 될 수 있었으나 네스토리우스의 반론은 소홀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반론이 시원찮다고 생각한 로마교구 측은 보라! 네스토리우스는 성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된 것으로 주장한 것이니 기독론 실패자로서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3. 네스토리우스의 정죄 추방


앞서 말했듯이 서로마와 동로마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를 제국교회의 영토에서 정죄 추방함으로 장차 세계사를 향한 자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로마 기독교가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큰 위협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네스토리우스는 동로마 지역이면서도 동·서로마 교회의 제 3지대의 출생이다.

제 3지대라 함은 로마제국의 영향권 밖의 출신임을 말한다. 서양 교회사에서는 동교회(The chruch of the East)로 구분하지만 동교회 지역의 자존심으로는 '아시아 교구' 또는 '아시아 기독교'를 자부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인 동교회 교구(아시아 교구)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동교회는 아르메니아 제국의 공국 오스로헨(수도 에뎃사)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해가 AD 280년으로 로마제국 앞에서 기독교에 있어서만은 자신감과 우월감을 가진 제국이었다.

페르시아를 중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지대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양 떼를 찾아가라고 명령하신 후 맹렬한 선교 확산지로서 교세가 로마 제국권 보다 훨씬 컸다. 더구나 페르시아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제국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후 300여년 동안 박빙의 승부지대가 특히 에뎃사 지역이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의 출생지가 에뎃사라고도 하고, 길리기아의 동 게르마니카라고도 한다. 두 곳 모두가 동교회, 또는 아시아 교구로서 네스토리우스의 출신 지역이 된다.

4. 네스토리우스 복권 기회가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제 3차 에베소 공의회(AD 431년)가 열리고, 한국식으로 하면 인민재판이나 계엄령시대의 군사재판보다 더 심한 방식으로 로마제국의 제 2인자(로마는 기독교가 국교였기에 황제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제 2인자, 로마대교구장(교황)이 제 3인자였다)를 불법회의에서 매장시킨 일이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키릴루스가 살아있고, 네스토리우스를 신뢰하던 황제 데오도시우스 Ⅱ세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재심의 기회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AD 444년 네스토리우스의 천적 키릴루스가 사망했다. 곧 이어 회의 준비를 서둘렀으나 그 회의는 '도적떼들의 회의'라는 오명을 남기고 불발했다. 드디어 AD 449년 데오도시우스 Ⅱ세가 눈을 감고 후임 황제로 마루키아누스 장군이 등극했다. 로마교구장(후에 교황) 레오(AD 461년)의 호의에 따라 AD 451년 칼케돈(현 터키의 카드케이)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네스토리우스는 추방 이후 20년 동안 요르단·이집트·리비아 사막을 떠돌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칼케돈 회의 출석 통보가 준비되었다. 에베소 공의회 불법의회에서 회복 불능이 된 네스토리우스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다. 그러나 그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결코 거짓됨이 없음을 증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출석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죽기 전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이제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었고 그분을 위해서만 살고 있다. 인간 네스토리우스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파문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네스토리우스의 신앙은 완성되었다. 마치 그의 기도는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에 접근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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