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장준하 선생 추모의 밤에 함석헌 선생.


하늘이 듣지않는 함석헌의 꿈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동경고등사범을 마치고 자신의 모교인 오산고보에 역사교사로 부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함석헌에게는 10년 세월 일구월심(日久月深), 비원의 꿈이 있었다. 농사와 교육과 종교를 하나로 묶는 생활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오산학교에 봉직하는 사이에도 틈 있는대로 일요말씀 모임을 인도할 때나 오산학교를 사임한 후 그대로 오산에 묻혀 두 해 동안 농군생활을 할 때에도 함석헌은 그의 머리속, 가슴속에 이 생활공동체를 그리고 있었고, 드디어 송산농사학원은 그로 하여금 '여기다!'하게 했다. 그 자신이 '…소위 내 운동이라 할만한 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한 그 자리다.

그런데, 그같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확신하여 가진 돈 전부, 몸 전체를 내던져 시작한 일을 그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계우회 사건으로 송산농사학원은 허사(?)가 되고, 농사꾼으로서의 결심까지도 접어야 했으니 함석헌은 그때의 일을 '첫 발자국에서 깨져버렸다'고 회상한다.

보다 신앙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함석헌을 통한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석헌을 어떻게 쓰겠다는 계획을 가지셨다면 함석헌의 천만가지 몸부림, 말 그대로 다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함석헌 자신이 자신을 쓴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를 영역한 David E. Ross의 「Kicked By God」은 이때의 함석헌에 대해 “However, God's 'Kicking' already was begining tolead me to another place”(이미 내게 대한 하나님의 발길은 다른 곳(함석헌이 뜻하지 않은, 필자 주)를 향하고 있었다)라고 했다(by The Wides Quaker Fellowship 1969, 12).

이제 함석헌은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시작한다. 신비스럽다 하리만큼 어리디 어린 나이에 철이 들어 도대체 사람이란 뭐며, 삶이란 뭔가? 자아란 뭐며, 뜻이란 뭔가를 40평생 물어온 그가 실로 이상한 지경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나는 내것이 아니라는 것', '절대의지에 의해 소유된 자'라는 것이 아직 명명한 것은 아니라해도 감지되어 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내것이 아닌 것을….' 그러면서 그는 '이제 나는 없고…' 하며 말 없이 흙바닥에 엎드렸다.

기독교에서 이런 경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한다. 이렇게해서 함석헌은 하나님께 맡겨진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 맡겨진다, 맡겨졌다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본래 내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맡긴다, 맡겼다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돌려 드린다', '돌려 드렸다' 해야 옳을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 드린다 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의 구현에 자신을 온통 내어놓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의 구현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는데 이런 경우를 일러 하나님께 맡겼다, 혹은 드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려졌다, 맡겨졌다 해도 그것은 생의 마지막 자리에서 드리는 신앙고백이지, 생의 전선에서의 실상은 순간 순간, 사사건건에서 당해가야 하는 희생, '죽어감, 죽어가는 것'이다. 절대의지의 실현을 위해 잔말 없이 죽어가는, 40 이후의 함석헌의 삶은 그러했다.

계우회 사건으로 한해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출소하여,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농사를 해야 한다고 마음 다부지게 먹고 준비를 시작해 가는데 또다시 감옥 갈 일이 터졌다.

소위 '성서조선 사건'이라는 것이다. 성서조선 사건은 '성서조선'의 발행인이었던 김교신 자신이 쓴 글 「조와」(弔蛙)가 일으킨 필화사건으로 이 성서조선의 300여 독자들 모두가 일경에 의해 검속을 당하게 된 사건이다.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에 실린 「조와」는 다음과 같은 김교신의 글을 전해준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던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왔다. 오랫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아드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데,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湛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가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보다!' 성서조선이 문제가 된 것은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한 그 아홉 글자 때문이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그것은 김교신의 가슴 속에 깊이 안겨있는 조선의 생명이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지경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은 생명의 기이함, 김교신의 눈에 그것은 미물이 아니었다. 죽음을 이기고 나온 거룩, 가히 신비 자체였다. 죽음의 권세가 삼킬 수 없는 절대의 생명이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성서조선이 일경의 눈엔 비켜갈 수 없는 불온하기 그지없는 무리들의 '글밭'이었다 해도 성서조선은 이제까지 무교회 신우들의 옳바른 신앙을 부양하기 위한 것으로 철저한 검열을 거쳐 출판해온 것,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1940년대의 흐름이었다. 일본은 일본의 한반도 통치의 좌시할 수 없는 저해세력으로 애국적인 지식계층을 주목했다. 그들은 용납할 수 없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특히 한국사, 한국어 학자들이 그랬다.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은 정신이요 혼이지, 어떤 외적인 힘이 결코 아니다. 어떤 종족이거나 족속이거나 문화거나, 역사에서의 멸실은 물리력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그 존재의 이유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 뜻이요, 의미다. 정신이요, 얼이요, 혼이다. 일본의 통치권력 역시 이 사실을 정확하게 겨냥했다. 일본은 필살(必殺)의 대상으로 조선의 혼(魂)을 정조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곧 성서조선 사건이요, 이어서 발생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1941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라는 것을 포고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자는 물론, 그 가능성의 심증만으로도 구금할 수 있는 악법이었다. 이때 대표적인 조선어 학자들이 실로 심혈을 기울여 「조선어사전」을 편찬 중에 있었다.

이 편찬에 참여한 편찬위원과 제정지원자 33명이 일경에 체포되고, 그 중 이윤재(李允宰), 한징(韓澄)은 옥중에서 일생을 마감한다. 당시 성서조선 지도자들의 수사를 맡았던 한 일본인 검사는 성서조선의 지도자들을 일컬어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 500년을 내다보는 놈들”이라 했다.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 폭행이 가해졌다. 함석헌과 일본 조사관들 사이에 참으로 질긴 기(氣)싸움이 시작됐다.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져오는데 말없이 맞아주는 것이 함석헌의 '기'였다. 함석헌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사정없는 고문을 해대면서 내심 '살려달라'고빌어오기를 기대했지만 '살려달라'기는 커녕 이제는 신음소리 마저 내지 않는 것이다.

'영원을 내다보는' 사람


1942년 5월, 일본 경찰의 오랏줄에 묶여 이번에는 서울로 잡혀올라가 서대문형무소의 옥살이 1년, 다음해 4월 초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온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망해있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제 그는 님의 발끝에 놓인 나무공 같은 주제, 그의 길은 철저히 님의 발길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존재다. 무슨 딴 길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함석헌의 하나님은 그가 농사꾼이 되겠다는 것까지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후 그의 살림살이를 보면 그저 '죽어주는 일' 외에 그에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밥은 먹어야 하는 것, 그래서 돌아온 함석헌은 이제는 아무 꿈도 없이 '풀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낮밤을 그저 보내고 맞곤 한다.

그래도 그는 누가 뭐라 해도 하늘이 낸 사람, 하늘이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토록 격심한 일제의 서슬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 압박에 어쩔수 없이 풀 속에 머리를 들이밀게 되었으면서도 '영원을 내다보기로 했다'(전집 4권, p.272)는 그의 내심의 선언이 이제까지 동서고금의 예언자들, 고승들을 넘어서는 특이한 그릇이었음을 증언해 준다.

함석헌의 말대로는 이렇다.

“옥중에서 시들었던 몸에 원기가 돌아올까 말까할 무렵 평소에도 가까운 친구라고 서로 마음에 허락했고, '성서조선'의 주필이었고, 같이 고생을 했던 김교신이 용천(龍川)까지를 왔습니다. 그때 징용령이 내려져 모든 젊은이들을 가만두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도록 강요하던 때입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김교신이 온 뜻은 징용령에 순종을 하면서라도 무슨 일을 해보잔 뜻이었습니다. 천리길을 찾아온 뜻 고맙기는 하지만 역시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또 약한 나였습니다. 그래서 동의를 못하고, 나는 아주 풀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영원을 내다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다. 함석헌 자신이 김교신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자신의 용기없음, 약함 때문이라 했지만 그가 김교신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그가 이미 '영원의 열려옴'을 분명히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글 읽기에 특심해온' 함석헌이었지만 그가 1938년 4월 오산학교를 사임한 이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하는 1943년 3월까지 5년여 간은 특히 함석헌의 독서의 범위가 극대화되는 때였고, 따라서 사상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때였다.

“가는 길은 내 길이요, 그 길은 다 다르다해도 종교의 구경은 하나”라는,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겐 영낙없이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사상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제 '나'를 벗은 함석헌은 오직 한가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 농사하는 일에 집중한다.

순간순간의 사사건건을 궁극적인 실제자와의 약속으로 경험한 함석헌에겐 분명히 농사일도 고맙기가 그지없는 일이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갔다. 이제는 농사꾼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품앗이를 아예 거부하거나 거북해 하던 사람들도 오거니 가거니, 주거니 받거니 내왕의 문이 열려 갔다.

그렇게 함석헌은 서대문 형무소 출소 이래 순전한 농사꾼으로 두 해를 넘고, 삼년째의 해를 맞았다. 바지저고리에 짚신에 머리는 제멋대로 자라도록 두었고, 수염 역시 그랬다. 거의 확실한 농사꾼이었다.

1945년이 밝았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해, 그런데 그렇듯 감격의 해가 함석헌에게는 차라리 없음만 못한 해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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