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8)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네스토리우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안디옥 교구 감독에서 제국교회 제 1인자의 자리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 올랐다. 때는 AD 428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Ⅱ세의 총애를 받은 그는 총대주교좌 착좌 제 1성으로 '황제여, 제국교회 안에 숨어 있는 이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황제 앞에 무릎 꿇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는 전언이 있다.

필자는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취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고 늘 생각해 오고 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루스에게 그가 무너지는 것을 볼 때 덕스러움이 약간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가 졸지에 아단자가 되어 추방되고 그 많은 제자들도 추방되었으며, 속설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 파문이후 로마제국 교회가 절반 쯤 텅비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가 재승박덕(재주가 덕을 뛰어넘는)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가고자 똘똘 뭉쳐 있었다는 에뎃사(현재 터키의 산리 우르파) 분위기를 보면서 그의 학덕과 뛰어난 지도력에 감탄하게 된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가슴이 철렁해진다. 왜냐하면 당시 에뎃사는 아시아 교회의 중심지였고, 수리아 안디옥은 헬라파 곧 로마제국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에뎃사 였을까?

에뎃사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영역의 대표성을 지니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에뎃사는 알렉산더대왕이 이곳을 정복하고 이름 지어준 그 이름으로 수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와 아라랏산 중간 쯤 유프라데스 강 서북방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지형적 조건 이전에 에뎃사는 아르메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아르메니아는 AD 280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로써 로마제국과는 어떤 의미에서 비교 우위의 나라였다. 이 부분에서 네스토리우스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을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상고대 사회로 올라가면 셈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노른자위 지대인 수메르의 수도 우르 출신 임을 상가하면 느낌이 있을 것이다. 중근동 역사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역사는 곧 창세기까지 포함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류(샛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예로 AD 150년 라틴 학파인 순교자 저스틴의 제자였던 타티안이 저스틴 사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취한 행동과 그의 학문적 성취에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자부심을 엿 볼 수 있다.

타티안이 아시아 또는 동방의 최초의 신학자라고 하는 것은 철학 뿐 아니라 동방교회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경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티안 자신이 조화복음서(Diatesaron)로서 헬라어 성경 번역본 최초의 성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이름으로 된 4권의 책이 아니라 타티안이 로마를 떠나기 전부터 번역을 시작했으리라고 보는 책으로 서방에서 사용하는 27권 속의 신약성경이 아니라 타티안이 직접 편집한 내용들이다. 이것이 한 수 위라고 자부하는 앗수리아 출신의 자부심이었다.

다시 우리는 네스토리우스 시대로 가 보자. 아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 아시아인들과 로마인들의 세력비교가 드러난 사도행전 2장으로 먼저 간다. 오순절 최초의 성령강림의 시간에 아시아와 유럽(로마)의 신자 분포는 80% 정도를 아시아로 분류 할 수 있다. 이는 바벨론 포로기 전 후로 형성된 디아스포라, 이방지대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이기도 했다.

특히 고레스 대왕의 페르시아 시대의 혜택(에스라 1:1∼)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고레스 이후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혜택을 받았으며, 그 이후 헬라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형성 된 동방 곧 범 아시아 교회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와는 문화적 차이를 낼 수 있었다.


1. 사상적 배경을 극복했어야


기독교의 한계였을까? 핍박시대를 살아오면서 로마와 아시아 지경으로 나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스 철학의 배경을 가진 로마 기독교, 앗수리아 즉 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배경으로 한 아시아 기독교는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만큼 멀어서 그 중간에 가로 막힌 히말라야 산맥을 뚫어 왕복 24차선 정도의 통로를 열든지 아니면 히말라야 산맥을 통째로 평토화 시켜버릴 만큼 위력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2. 아시아적 우월감과 역사기독교의 대응


로마제국의 속방노릇을 해오던 예루살렘이 초월적 메시아를 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앞서 아시아 우월감을 잠깐 언급했으나 기독교 주력기반이 로마제국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곧 기독교의 한계일 수도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가 분명히 로마식 조건을 가졌음에도 그를 에뎃사 방향으로 몰아낼 수 밖에 없었던 로마 교구는 알렉산드리아 풍운아 키릴루스 대주교를 통해서 절반의 승리를 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시아 교구는 타티안이나 에뎃사의 바 다이산, 급할 경우 아나톨리아 북방 본도 교구 주교의 아들 마르시온까지 동원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2세기 중 후반까지였고, 현실적 지도력 공백기에 있었던 아시아 교구는 네스토리우스 세력을 수고하지 않고도 얻었으니 저들 아시아 교구에게는 천군만마가 분명했다.


3. 네스토리우스의 고뇌와 복음완성


네스토리우스가 그의 완벽에 가까운 후견인이었던 데오도시우스 Ⅱ세의 배반과 함께 제국이 허락한 왕중왕의 자리인 총대주교좌에서 밀려나서 지옥보다 더 험악한 요르단, 이집트, 리비아 사막으로 내몰리며 그의 변증서 한 페이지를 쓸 수 없었던 20년, 인고끝에 헤라클레이데스(Heracleides)라는 익명으로 변증서 한 권을 몰래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해야 했던 네스토리우스의 고뇌를 어찌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에게 있어서 그의 후반생이 치욕이요 분노의 연속인 듯 싶었으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시간에 AD 451년에 에뎃사에 집결한 제자들이 네스토리우스의 아시아 선교를 본격화 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지도자를 양성했고, 페르시아의 깊숙한 곳을 향하여 니스비시, 크데시폰으로, 다시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미르 고원 너머로 진군해 갔다.

사막에 내던져진 자 되어 20년을 죽음 같은 시련 속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십자가 신학을 매우 투명하게 완성했다. 그는 임종 직전 남긴 유언 중에는 ‘나는 이제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었고 그 분을 위해서만 살고 있다. 인간 네스토리우스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파문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고백록이 기록되는 순간, AD 451년 칼케돈 제 4차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석명 또는 소명의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역사는 이를 더욱 성의있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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