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1960년 말 한 지방교회 순회집회 중.


거름통 메고 들은 해방소식


함석헌을 사용해가시는 그의 하나님은 함석헌과의 약속에서였거나 혹은 일방적으로였거나, 하나, 분명한 것은 함석헌으로 하여금 결코 제 맘, 제 계획대로 살 수 없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네 맘대로는 안된다!”

그랬다. 좋은 계획 좋은 일까지도, 의로운 계획 의로운 일까지도, 아니 '위대한', '거룩한'이라 표현할만한 계획까지도 그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코 제 맘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 지존자에 의해 이미 '죽어야 하는 자'로 결정되어진 자에게 '죽어지는 것' 말고 어찌 딴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갓난아이 때부터 이제까지의 45년 그의 삶의 발자국 자국은 한치도 틀림없는 어린양의 그것이었다.

범죄한 나라, 범죄한 역사의 새로서기, 새로살기를 위해 하나쯤 그같은 순제물(純祭物)이 있어야만 했다. 이제까지의 45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일생 89년, 32,605일이 그랬다. 1945년 8월 15일 함석헌은 이날도 이글거리는 뙤약볕을 그대로 받으며 똥통을 멘채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농사꾼조차 될 수 없는 그였지만 왠지 농사하는 일만은 늘 좋았고, 고맙기까지 했다.

흙에 엎데일 때 그는 철저한 농사꾼이었고, '하루 한 번 땀을 흘려 죄를 씻기 잊지 말고…'를 그의 삶의 신조로 외워갔다. 그는 언제나 역사 앞에 죄인이므로 울었고, 농사일로 온 몸을 적시는 땀으로 그 죄를 씻어내는 세제(洗劑)를 삼았다. 조카 최창복이 밭으로 함석헌을 찾아왔다.

“삼촌, 해방됐대요. 해방. 용암포 인민들이 삼촌 빨리 모시고 와야 한대요. 지금 야단입니다. 삼촌 모셔오라고요.”

딱 짤라 거부하는 함석헌의 불응에 하는수 없이 돌아간 최창복이 두어시간쯤 지나 이번에는 용암 인민의 대표라는 사람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선생님 가셔야 겠습니다. 지금 용암면민들이 다들 공회당에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축하식을 주장하셔야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선생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기쁘지, 아니 기쁘겠느냐? 그렇지만 나는 내식대로 축하한다고 그래라”며 조카를 되돌려 보냈던 함석헌도 이번엔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도 기쁘지, 아니 기쁘겠느냐?”했듯이 사실 그의 가슴엔 “조선 해방이라! 그게 오긴 왔구나!”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도없이 오고간 죽음과 삶 사이의 전신을 흔드는 위기들이 얼마였던가?….

인민들의 대표로 나서는 함석헌


어쨌든 함석헌은 안내하는 이를 따라가 용암포인들의 축하식에 참석하여 용암포면민들의 대표로 용천군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역시 용천군 인민의 대표가 된다. 조선임시정부 용천군 군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는 글자 그대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이미 8월 12일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에 의해서 이루어져가는 조선임시정부의 구조가 그랬다. 임시정부의 면조직, 군조직을 마치고, 8월 25일 1시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인민대표 63인이 모여 대표자 회의를 열어 평북 임시자치위원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함석헌은 용천군 대표로 참석하여 9부(보안, 재무, 농림, 상업, 산업, 사법, 보건, 문교) 중 문교부장직에 선임된다.

순간 순간 당하는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일이라면 당하는 어떤 일도 내 일 아니라 할 수 없겠지만 정말 함석헌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야 말로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면위원장, 군위원장, 도 문교 책임자 하는 등등의 자리들이 함석헌 개인에게는 아주 분명히 재앙을 더하는 진행이었음을 두고하는 말이다.

용천자치위원장직을 맡자마자 신의주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자치위원회의 조직이나 재정 등 어느것도 손댈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말 우스운 것은 그런 중에서도 함석헌은 몇몇 직원들과 함께 말을 나누어 타고, 용천군 일대를 순행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9월 용천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 평북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취임한다. 물론 그것도 곧 내주고(?), 물러나(?)야 하는 자리였지만 말이다.

그는 그 과정 모두가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밭에서 거름통을 지고 해방소식을 듣고 용암포면, 용천군, 평북자치위원회의 요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느낌을 그는 그의 전집 4권 275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나오라고 하는 것은 나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나더러 이용당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용이람 이용입니다. 그러나 이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체(全體=역사의 주체·필자주)에는 이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체는 모든 사람을 이용합니다. 쓸때는 쓰고, 쓰고나면 사정없이 버릴 것입니다. 이용당해도 그런줄을 알고 당하면 좋습니다. 다만 한가지 문제입니다. 내가 전체를 마주 이용하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편에서 만일 조금이라도 이용되는 대신 나도 또 전체를 이용하잔 생각이 있으면 도둑입니다.

나는 그 죄는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하고 있노라는 증언만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온전히 깨끗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의식적으로 그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내게는 약한 맘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약해서 감히 큰 일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 나의 약점이 항상 나를 건져줍니다.”

그러나 오산교단 10년을 비롯해 50을 바라보는 이제까지 글로 살아온 함석헌에게 문교부장 자리는 세상 벼슬자리만은 아니었다. 관심도 있고 의욕도 있었다. 국가라는 것, 기존 종교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같은 틀을 깨트리고 자주, 자유하는 참 인격을 키워내는 '새교육'의 터전은 일찍부터 꾸어온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취임하자마자 부딪힌 것이 철벽이었다. 이미 거의 완벽하다 하리만큼 모든 교육방침, 교육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전에 함석헌 자신이 온몸으로 거부하고, 단절을 선언했던 일본제국주의의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또다시 함석헌의 저항이 시작된다. 의식이 일기 시작할 때부터 함석헌은 이상하리만큼 '스스로 함'의 혼을 품었다. 그것은 함석헌에겐 생명과 꼭같이 귀한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노예란 '스스로 함'의 삶을 빼앗긴, 혹은 버린 생명을 의미했다. '스스로 함의 신앙', 이것이 함석헌이 평생을 자유인(自由人)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삼류·비주류(三流·非主流)로 살게 한 것이다!


다시 바닥살이로


취임 몇날 후 함석헌은 문교부장 사직원을 제출했다. 물론 그 사직서의 이유는 그저 '일신상의 사정으로'라고 사직이유를 밝힐 수밖에 었었지만 사실은 이미 그 '짜여진대로'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함'의 반역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위원장이 이유필(李裕弼)이라는 이었는데 이유필은 확고한 민족주의자로 함석헌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이 사표를 제출한 다음날, 함석헌을 위원장실로 조용히 부른 그는 “함 선생, 내가 어찌 함 선생의 심정을 모르겠소. 나도 조만간 그만둘 생각이요. 그만둔다 해도 같이 그만둡시다”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노인의 말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터졌다. 거의 함석헌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하루이틀 하는 사이 소위 '신의주학생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감옥, 새 역사 새 종교에로의 관문


신의주 학생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로 참여한 학생들은 자유주의 정신을 자랑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소련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산당이 일선에 나서면서 포악과 강탈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이들 학생들이 조직을 완료하고 함석헌에게 회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배후에서 돕기로 하고 대신 고문직을 수락했는데, 그 단체 이름을 '우리 청년회'라 했다.

그런데 이 청년회 학생부에 속해있던 시내에 있는 고등학생들, 공산당의 강포에 항의하려는 학생들이 공산당 본부에 몰려들었는데 당시 문교부장이었던 함석헌이 이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바로 이 현장이 함석헌에게 있어 또하나 함석헌의 운명을 읽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여기저기 시체로 누워있는 학생들, 죽어가는 학생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가 하면 총탄이 몸에 박힌 채 유혈이 낭자해 있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한 학생의 시신 위에 엎디어, '어…, 세상에 이런 일이!'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10여 명이나 되는 소총에 착검을 한 소련군인들이 달려들어 함석헌을 에워싸는가 하더니 그중에 한 지휘관이 마치 한 구호를 외치듯, 큰 함성을 발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그 소련 군 사관의 고함소리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자가 바로 학생들을 선동하여 공산당 본부를 침입하게 한 주모자'라는 것 같았다.

그 지휘관의 고함소리가 그치자마자 정신없이 몽둥이질이 가해졌다. 한 군인이 사정없이 함석헌의 뒤통수를 갈겼다. 그 현장에는 한국인 보안부장 한웅 이라는 자도 끼어 있었다.

계속해서 터덕, 터덕 몽둥이질을 당하는데도 이제는 아픈줄 조차 모른다. 정신을 잃은 채 어디론지 끌려간 함석헌은 소련군 사령관을 거쳐 도경찰부 유치장에 내던져졌다. 함석헌의 다섯번째 감옥길이었다.

첫번째가 동경 유학 중 하룻밤, 두번째가 오산에 역사교사로 부임한 다음해 공산주의 독서회 사건으로 1주일, 세번째 계우회 사건으로 1년, 넷째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 그리고 이번 신의주학생 사건으로 50일(쉰살)이 다섯번째 김옥길이었다.

이후 함석헌은 이북에서 30일 감옥살이 한 차례를 더하고 1947년 월남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치면서 여섯번 옥살이를 더 해 열두번의 감옥길을 거치게 된다.

감옥은 함석헌에게 형언키 어려운 지극한 선물을 준다. '내 종교'를 갖도록까지 함석헌을 이끈다. 특히 일제치하에서의 감옥이 그랬다. 감옥은 함석헌에게 새 영혼, 새 역사를 이루게 하는 지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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