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30)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칼케돈 회의를 끝내면서 기독교는 새로운 다짐을 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등장과 제국 역사 무대의 동반실력자 된 기독교의 150년 정도(AD 313∼476년) 정도를 요약정리 해 볼 필요가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매우 치열하고 절박한 투쟁을 해왔다.

콘스탄티누스의 경우는 쇠망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을 재흥시켜보려는 충심과 야심 성취를 위하여 지하종교인 기독교를 합법화 시킨 후 재국 중흥의 동반자로 대우했다.

그는 제국은 하나, 황제도 하나, 종교도 하나 라는 숭엄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 갔다. 제국은 통일 황제권 단독강화로 이루었으나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큰 균열을 보이고 있어서 이를 해결코자 니케아 회의(AD 325년), 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6), 에베소 회의(AD 431년), 칼케돈 회의(AD 451년) 1, 2, 3, 4차로 이어가며 열었고, 그 결과 '칼케돈 공식'으로 일컫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설득력있게 다듬어 졌다.

그러나 이는 ① 로마교구(서로마 수도인 로마에 교구청을 둔 교파)만의 축제였고, ②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로마 권이나, ③ 아리우스 등의 단성론 그룹들은 물론 ④ 1세기부터, '동교회'(The Church of the East)라 이름하여 로마의 동쪽 변경 취급을 당한 교파들은 각기 별도의 길을 갔다. 특히 동교회는 '칼케돈 회의' 와 거의 동시에 네스토리우스가 완전희생 된 후 그의 제자들 중심으로 '동교회' 수준을 뛰어 넘는 교단이 형성 되었다. 이들은 아시아 선교에 본격 진출한다.

이처럼 사분오열되는 기독교를 살펴보면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제국이 기독교 살림에 너무 깊이 개입했다는 후회같은 고백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1. 데오도시우스(AD 379∼395년) 국교화 과정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앙과 함께 정치철학자요 또는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수준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그의 재임기간(AD 306∼337년)에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시도했을 법한 기독교 국교화 작업을 서두르지 않은 점이야말로 그의 탁월성에서 온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그의 치세기간에 실현한 '기독교 자유령'을 단행한 일만으로도 수구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나 그의 사후 율리아누스(AD 361∼363년)의 반역을 보더라도 기독교 국교화가 곧 콘스탄티누스의 몫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데오도시우스(AD 379∼395년) 대제 때에 이르러 국교화가 이루어진다(AD 392년). 그는 게르만 민족이동기에 고트족을 격멸하는 등 덕망 높은 인격 때문에 대제(Great)의 칭호가 붙은 인물이었다. 스페인 출신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후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AD 379년 동방지역의 부황제에 올랐으며, 정제의 위에 올라 명실상부한 제국의 황제가 된 후(AD 392∼) 로마 제국의 통일과 기독교 정통신학(로마교구 신학)의 수위성을 지켜 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명망을 과신했을까? 로마제국의 국교화(AD 392년)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국교가 된 기독교가 향후 제국의 지상권과 종교권 사이에서 어떤 균형추를 사용했을까, 가 매우 궁금하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을 기뻐했으리라는 판단을 해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부름에 따라서 지하교회에서 지상교회로, 제국의 비호(보호)를 받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국교행세를 해왔던 로마 교구 등으로서는 데오도시우스의 국교선언에 행복감을 만끽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교회는 '국교화' 이후 급격하게 도덕성이 추락해 갔음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로마제국이 교회로 전환했으니 제국 안에 있는 여러 이단들이나 종교들이 간판만 기독교로 해놓고 각기 제멋대로 자기들의 종파(종교)를 운영해 갈 수 있는 안정된 기반이 마련되었다.

더구나 데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어린 상태에서 동서 제국을 승계 받으면서 정치적 기반이 사정없이 약화 되기에 이르렀다.

2. 서로마의 멸망


AD 476년 로물루스 11세의 방으로 찾아간 장군 한 사람이 있었다. 게르만 출신 오토아케르 였다. 그는 황제를 향하여, “그 자리는 내 자리입니다. 내려오시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건이 곧 서로마 제국의 종말 사건이며, 게르만 민족이 제국을 인수한 사건이 된다. 이로써 일부 인류문화사는 AD 476년이 서로마제국이 멸망 한 해로 여기면서 조용한 시대 전환이 이루어 진다.

3. 게르만 민족


게르만 민족 이동기는 3세기 이후 약 5백여년으로 본다. 전체 유럽은 게르만의 무대였다. 게르만이 로마제국을 인수하게 된 것은 그들의 결집력 그 민족의 성격은 지도자의 뜻을 잘 따르는 본능성이 강한 종족의 성격을 가졌다.

게르만 민족에게는 아리우스파의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프랑크 게르만이 로마 교구와 결집된 힘을 가지면서 게르만과 기독교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졌다. 로마제국이 게르만의 한 장수에게 제국의 황제권을 내 주었고, 그것을 이어받은 게르만의 오토아케르 장군은 로마인 처럼 로마를 통치해갔다.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 참여하기 시작한지 2백여년 안에 그들은 제국을 인수했다.


4. 로마교구가 교황제로 승격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AD 476년으로 기정사실화 했을 때 서로마, 곧 서유럽지역의 지상권 통치자의 공백을 불러왔다. 그 보다 먼저 황제와 교회 수장이 서로 수위권을 요구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암브로시우스 밀란 교구 감독이 '성례참여 불가'의 강수를 통해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무릎 꿇게 했던 사건은 표면상 이유보다는 종교권과 지상권 간의 수위권 다툼으로 볼 수도 있다.

교황제도는 시프리안 감독의 발상에서 출현했으며, 본격적인 교황제의 정착은 AD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극으로 시작된다. 특히 기독교 신교(일명 개신교)에서는 초대 교황을 그레고리 대제 출현기인 AD 590년으로 본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사도를 제 1대 교황으로 자기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5. 지상권과 수위권 경쟁을 한 교황들


로마 제국 안에서 이단은 물론 이교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당당한 기독교 제국을 이루어 낸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부로시우스 감독 앞에서 쩔쩔 맨 것은 황제권을 발 아래 두고 싶었던 로마교구의 욕망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한 형태가 그레고리 7세가 헨리4세를 추운 겨울 알프스 산장 문 밖에 3일 밤낮을 세워 두었던 사건이라면 어떨까?

6. 교리 강화에서도 수위권 내세우는 로마 교황청

제 1차 니케아 회의(AD 325년) 후 삼위일체론 해석에서 그들은 성령론 해석에서 시비를 걸고 나섰다. 니케아 신조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에서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되 성자를 경유한다'를 별도로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니케아 회의 후 7백여년이 지난 AD 1054년 '성령발출론 시비'로 말미암아 동서로마 교회가 두조각이 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같은 사태의 결과는 로마 가톨릭이 '성령론' 으로 말미암아 황제의 권세를 흔들었고, 로마제국 교회의 마지막 절반을 잃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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