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로마교구의 실체

동로마 교구가 자연스럽게 분리 되었다. 5세기 말 현재, 예루살렘,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천도(수도를 옮김)한 AD 330년 자연스럽게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탄생했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로마 제국의 중흥조인 콘스탄티누스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서)로마 교구와 동로마 교구의 충돌이 있게 된다. 황제가 교회의 교리 선택권에서 중립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기에는 야심이 너무 큰 황제였다. 그래서 제국, 황제, 종교는 각각 '하나' 여야 한다는 과욕을 부렸다.

그러니 황제에게 빚을 진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그래서 로마 교구는 콘스탄티누스가 주도했던 제 1차 니케아 종교회의(AD 325년) 과정에서 최소한의 대의원만 파송하였으며, '니케아 신조'에 대한 존중의 뜻이 빈약했다. 특히 로마교구의 '니케아 신조' 중 성령론 불복 부분은 700년 동안 동 서로마가 교회의 갈등을 불러왔고, 결국 AD 1054년 동 서로마 기독교는 결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 1차 니케아 종교회의 아리우스 단성론을 정죄하기 위해서 소집되었으나 아리우스를 적극 옹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까닭에 제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친 지역들이 정통론(양성론)과 단성론 교리 선택 과정에서 단성론으로 기울었다. 더구나 '칼케돈 공식'이라 할 만큼 성공적 회의였다고 로마 교구는 자평하고 있는 제 4차 칼케돈 회의(AD 451년) 이후 알렉산드리아나 팔레스타인(예루살렘)교구는 칼케돈 기독론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셨다.

그럼, 단성론 기독교에 만족하려드는 단성론파는 왜 그렇게 적극적인 반대를 하고 나섰을까? 그들은 칼케돈 기독론이 말하는 두 본성의 교리가 필연적으로 두 위격 교리로 이어지고, 따라서 그리스도 한 분이 신성과 인성을 따로 가진다고 볼 경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두 아들이 되고 말 것이며, 이는 이단으로 처벌한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과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했다. 그들 단성론 파는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본성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제 5차 공의회(AD 553년)에서도 기독론이 흔들렸다. 당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AD 527∼565년)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또 한 사람의 강자로써 스스로를 입법자, 신학자, 참 신앙 수호자, 정복자의 명성까지 박식하고 강성한 군주였으나 단성론자인 황후 테오도라의 치마폭에 휘둘리며 칼케돈 기독론과 범 아리우스 기독론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6세기 말까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存在)확인을 못하게 만들었다.


3. 아시아 기독교와 네스토리우스

'아시아 기독교'의 설정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기독교의 21세기에는 좀 더 신뢰할 만한 사관(史觀)을 필요로 한다. 한 때는 동방, 메소포타미아, 또는 페르시아가 대표하는 듯 했으나 5,6세기 과정에서 그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네스토리우스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의 세력 가운데서 성장해 가던 세계 기독교는 동 서로마의 투쟁 과정에서 네스토리우스가 희생되었으나, 그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신분에 합당한 세력을 분할해서 유럽의 상대세력인 아시아로 기독교 세계를 양분하게 된다.

1세기 유럽 기독교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했다면 아시아(당시는 동 기독교로 표기하기도 했음) 기독교는 에뎃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역을 의식하게 되는 5세기 말에 이르러서 유럽 기독교의 대표권은 (수리아)안디옥에서 로마 교황권이 차지하고, 아시아 기독교는 에뎃사 生에서 대표성을 네스토리우스 파가 차지하게 된다.

아시아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 파가 합세하는 AD 451년 이후 경쟁력을 확보하여 마니교, 조로아스터교에 좇기던 아시아(페르시아) 기독교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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