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 선생 60년 기념모임(사진 첫째줄 왼쪽 첫번째 함석헌 선생).



미국 제국주의자들도,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함석헌에게 있어 국가 권력은 예외없이 악(惡)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어느 경우에도 국민일 수가 없었다. 그가 사랑한 것, 사랑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나라였다. 함석헌에게 있어 나라란 민중공동체를 의미한다. 곧 씨알의 조직이다.

일본도, 소련도, 김일성의 공산당도, 미국까지도 국가란 용납할 수 없는 악이었다. 철권(鐵拳)으로 조선을 통치해온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에 대해서까지도 함석헌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1941년 계우회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어 3개월여의 감옥살이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평양 근교의 강서라는 곳에서 일경의 눈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중의 안이현(1935년 오산 졸업생)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는 함석헌이 찾아왔다. 안이현은 감격에 겨워 어쩔줄을 몰랐다.

“선생님이 이런 깊은 곳까지 나를 찾아오시다니….”

안이현은 함석헌을 안내하여 강서고분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적지않은 위로의 말을 들었다.

“견디게나. 견딘다는 것은 칼날을 쥐어잡는 마음이야….”

그리고 함석헌은 약간 말에 뜸을 들이더니 혼자만의 독백처럼 “이놈의 전쟁에서 (태평양전쟁·필자주) 미국 제국주의자들, 일본 제국자들 모두 태평양에 빠져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하는 것이었다.

안이현은 함석헌의 홀로하는 그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본은 제국주의요, 군국주의이기 때문에 망해야 하겠지만 미국은 “자유를 사랑하고 남을 도와주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인도주의자들인데 왜 망해야 한다는 것일까”고.

그런데 그런 반국가주의자 함석헌이 “에라, 아주 쉴곳으로 가자”며 제자의 손에 이끌려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 하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38선을 넘게 된 것이다.

'아주 쉴 곳'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거기는 참을 찾아가는 길에 형극(荊棘)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을까? 거기는 자유의 깊은 숨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이제는 역사적인 짐은 벗어버리라. 죽기까지 짐 없이 살리라는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니 말이다. 살아생전에 함석헌 스스로 말한 적도 없고, 주변의 어느 누가 그 말의 뜻을 물어 밝힌 적도 없으니 그 말은 영원히 미제로 남는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곳은 어디를 말한 것일까?

함석헌이 '아주 쉴 곳'이라고 말한 그곳은. 일단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남한 땅만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무슨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일까? '아주 쉴 곳'이란 말이 필자에겐 기이하기 그지없는 말로 들려온다. 필자만일까? 함석헌의 그 '아주 쉴 곳'이.


함석헌과 박승방, 그리고 최진삼


박승방의 전신을 짜낸듯 하는 선생님의 월남강청의 자리에 이미 함석헌의 분신이 된 최진삼이 함께 있었다.

“선생님, 내려가셔야 합니다. 선생님만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선생님 하실 일 하늘처럼 큽니다. 머뭇거리시면 안됩니다.”

박승방의 말은 거칠 것이 없었다. 딱이 그 분위기는 누가 스승인지, 누가 제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하하기로 작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함석헌은 소극적인데 반해 박승방은 적극적이었다. 통한 사람의 능력은 그런 것인가.

결단을 내린 것은 최진삼이었다. 최진삼은 누구보다도 함석헌의 어머니께 대한 효심을 읽고 있는 사람으로 이미 아들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때까지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님은 부엌에서 손님의 먹을 것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최진삼이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박승방이 찾아온 이유와 지금 함석헌과 나누고 있는 이야기의 전말을 조심스러히 전했다.

“가야지, 가야하고 말고” 하면서 김형도는 최진삼과 함께 함석헌의 글방으로 들어와 박승방과의 사이의 이야기를 도왔다. 하는 말은 여전히 “가야지, 가야하고 말고…”였다.

여전히 억척은 박승방이었다. 상황을 받아들인 함석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에 애독해오던 신구약성경과 50일 옥중에서 쓴 시 〈쉰 날〉(이 쉰 날은 제자 김일선이 다시 베껴 한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었음. 필자주)만을 들고 박승방을 따라 나섰다.

문간에 서 있던 어머니 김형도는 “내 생각 말고 어서 가거라”는 한마디로 그 사랑하는 아들을 하늘의 아들, 역사의 아들로 영원히 내드렸다.

함석헌의 혼에 메인 사람! 아마 최진삼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형도에게도, 함석헌에게도 한 마디의 논의 없이 최진삼은 박승방을 따라 나섰다. 평양→해주→38선→서울로 이어져야 하는 길이다. 평양에는 또 하나의 최진삼인 최태사가 있었다. 이 최태사 역시 함석헌의 혼을 함께 나눈 사람이었다.

최태사는 1922년 함석헌이 오산중학 4학년 때 입학생이었는데, 함석헌이 동경고사를 마치고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 부임해 오던 때는 오산학교를 이미 졸업하여 약종상을 하면서 적지않은 돈을 벌고 있었고, 함석헌이 월남할 무렵에는 평양에서 큼직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월남길에 제자들에게 이끌려 평양에 들르게 된 함석헌은 그야말로 최태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박승방에겐 함석헌이 서울에 안착하기까지 필요한 노자를 넉넉하도록 쥐어주었다.



통곡하는 역사의 새 아들들


평양에서 잊을 수 없는 모임이 있었다. 김두혁의 송산농사학원을 함석헌이 인수하게 될 때, 동경 농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재일유학생들로부터의 모금책을 맡았던 김태훈, 안이현, 김언병 등 8명의 학생들이 주선한 '함석헌의 밤'이 그것이었다. 저들은 대부분이 청년교사들이었다. 저들의 교사로서의 삶은 함석헌의 영향이었다.

그 밤(1947. 2. 27∼3. 2일 사이의 어느 날, 필자주)은 눈물의 밤이었다. 함석헌과 함석헌의 사람들이 얼싸안고 통곡하는 밤이었다. 기어이 새 역사를 서원하는 밤이었다. 최태사의 집에서 일주일 숨어 지낸 함석헌은 박승방의 계획에 따라 해주로 향한다. 최진삼은 평양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젊은 청년들의 조사가 아주 심했기 때문이었다.

최진삼은 독자적인 힘으로 바로 함석헌을 뒤쫓아 남하해서 함석헌과 합류해 함석헌이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생을 함께 했다. 박승방은 함석헌과 함께 해주에 이르러, 역시 박승방과의 오산의 동창으로 함석헌의 제자였던 박진서를 찾았다. 이미 박진서는 어떻게 38선을 넘을 것인지를 자기 마을의 골목길을 알고 있듯이 환히 확인해 놓고 있었다. 박진서의 집에서 지내면서 며칠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월남길을 안내할 안내인을 찾는 일 때문이었다. 이는 방승방과 함께 함석헌의 월남을 계획한 박진서의 몫이었다.

드디어 안내인과 연락이 닿았고, 날이 좀 어두워지면 출발하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안내인은 박진서의 집을 찾았고, 박진서의 집에서 함석헌은 박승방과 함께 북녘땅에서의 마지막 저녁식탁을 받았다. 박진서의 아내가 정성으로 준비한 식탁이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데, 안내인의 “자, 이제 출발합시다” 하는 한마디가 마치 선전포고와 같다고나 할까? 온 분위기를 무거운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족히 다섯시간은 걸었을 것이었다.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게 소련군들의 초소입니다. 저 초소만 지나면 남한에 이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바짝 가까이가서 숨어있다가 경기병의 교대시간을 이용해 빠저나가면 됩니다.”

안내인의 말은 그랬지만 두려움의 무게는 더해왔다. 소련군인들의 근무교대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안내인의 발길은 잘 훈련된 병사와도 같았다. 함석헌도 박승방도 안내인을 따르기에 여념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투하는 기분으로 얼마를 걸었을까. 돌뿌리, 나뭇가지에 수도 알 수 없을 만큼 걸려 넘어지며 걸었는데. 아, 안내인에게서부터 전해오는 한 소리에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그 한 소리. “여기서부터 이남입니다. 이제 전 돌아갑니다.” 하고 안내인은 한마디도 더 하는 말 없이 오던 길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미 최태사를 통해서 받아가진 돈 중에 과하다 하리만큼 계약금을 주어놓았던 터다.



사선을 넘어 부른 노래


안내인을 따라 38도선을 넘은 함석헌이 한 첫 일이 박승방과 그의 하나님께 드린 예배였다.

그대로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린 것이다. 부른 찬송은 그가 스스로 번역해 부른 그의 평생의 노래 〈내 주를 가까이〉였다. 그는 '자유'에 미친 사람이었는지라 주(主)라는 말을 싫어했다.

주(主)라 하면 종(從)이 전제된 것이라 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주종제도를 철폐하신 이라 했다. 그러면서 '내 주를'을 '내 님을'이라고 고쳐 불렀다.


나타나 보이는 저 사다리 하늘에 닿으니 웬 은혠가. 천사 날 불러서 내 님을 가까이 내 님을 가까이 더 가까이 / 기쁜맘 깨어나 님을 노래, 돌 같은 내 슬픔 싸여 제단 한숨을 쉬어도 내 님을 가까이, 내 님을 가까이 더 가까이 / 가벼운 날개 쳐 하늘 날 때 해·달·별 다 잊고 올라가리. 영원한 노래로 내 님을 가까이, 내 님을 가까이 더 가까이.


저 아래 남쪽에 내 선생님, 내 친구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있다. 함석헌은 제단을 털고 일어나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17일, 새 날이었다. 그리고 열흠쯤 후 함석헌과 박승방은 서울 땅을 밟았다. 사선을 넘은 것이었다. 자유의 땅을 찾은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남아버린 말, 그가 말했던 '아주 쉴 곳'을 찾은 것이다. 정말 사선을 넘은 것이었을까? 정말 자유의 땅을 찾은 것이었을까? 정말 아주 쉴 곳이었을까?

그러나 함석헌이 38선을 넘은 것은 함석헌을 위해 다행이 아니요, 남북한 민(民) 모두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후에 저명한 영문학자로 알려지는 고병려는 함석헌의 월남사실을 두고 “이제 한반도의 저울 추가 남으로 기울었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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