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35)-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서로마제국은 AD 476년 게르만 장수 오토아케르에 의해 도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장시키면서 무너졌다. 제국의 역사는 그러나 우물쭈물, 역사학자들의 자기 혼돈이 물려준 유산이기도 하다.

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구분이 콘스탄티누스 등장 이후 사라졌으나, 기독교를 무리하게 로마 국교(AD 392년)로 삼은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두 아들 중 형인 아르카우스에게 동로마를 맡기고 동생인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를 맡겼다. 10세 미만의 두 아들에게. 아들에게 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나 7살 짜리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가 아버지 황제가 머물고 있는 밀라노에 도착하기 전에 데오도시우스는 50살 나이로 사망했다. 데오도시우스가 10년만 더 살아서 통치를 했으면 서로마 제국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1. AD 476년 전후의 로마


1) 섣부른 국교화:데오도시우스는 로마제국을 기독교에게 바쳤다. 다시 말하면 국교화였다(AD 392년). 기독교 국교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의 영광일 수 있으나 기독교의 세속화가 거침없이 이루어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로마제국이 하나의 교회이니 외형상으로 타종교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이교세력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기독교로 위장을 하여 잔명을 유지하였다. 더 약삭 빠른 자들은 2중 종교로 행세하였을 것이니 결국은 기독교 본체의 축이 무너지는 절차과정을 겪게 되었다.


2) 민족이동기의 게르마니아:
로마제국은 라인강 북방에 자리한 게르마니아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 도도한 줄리어스시저도 게르만 침략전에 실패를 했을만큼 강인한 게르마니아 용병을 너무 많이 허용했다.


2. 게르만 기독교


정면으로 게르마니아를 상대할만큼 로마제국은 군세가 넉넉지 않았다. 오토아케르는 명목상의 서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의 서로마를 게르만 제국으로 선포하지는 못했다.


1) 정통파와 아리우스파 관계:
로마제국 안에서 게르만족의 득세는 서로마 제국을 집어삼킬 만큼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단세력(AD 325년 니케아회의때 정죄)은 게르마니아 전 종족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게르만족이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정통 기독교 보다 신의 대리인 예수를 가르치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더 좋아했다. 정통파와 아리우스파가 연합하여 중세로마-게르마니아 유럽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고, 더 큰 아리우스파의 의미는 머지않아 태어날 이슬람의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다.

2)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 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AD 493∼540년)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최고의 통치력을 보여준 황제였다. 서로마제국 멸망(AD 476년) 이후 잃어버린 제국 영토를 거의 모두 회복하고 확장시키기까지 했고, 그의 아내인 황후 테오도라의 영향력이 황제를 도와 전성기를 이룬다.



3. 아라비아의 학대


1) 아라비아의 전술:대추야자, 향료, 향수, 도예 등을 실은 메카의 카라반들이 사막을 빠져나와 거대한 제국 로마의 지중해권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를 확인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시대가 지나고, 로마는 페르시아와 각축을 벌이면서 시리아쪽에 빈틈을 보이고 있었다.

아라비아는 카라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들 중 이단자들 취급을 받는 아리우스 유파들과 사귐을 갖는 데도 상당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주목하고 실력을 기르고 있는 무함마드가 그들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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