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1980년대 함석헌 선생과 필자(함석헌 선생의 서재에서).

'아주 쉴 곳' 바닥(민중), 바닥살이

함석헌이 여섯번째의 30일 감옥살이를 끝내고 나오는 날, 보안서장으로부터 백영엽의 동태를 면밀히 살펴 한주일에 한번씩 은밀히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백영엽은 이유필의 후임으로 평북인민자치위원회의 위원장 직임을 맡고 있는 함석헌이 깊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함석헌이 그의 자서전에서 '내 존경하는 선배인 백영엽 목사'라고 칭하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의 동태를 살펴 보고 하라니, 분명히 말해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몇 차례는 별일 없었다며 넘기곤 했지만 이후에는 그럴 수가 없게 된 분위기를 알아챈 함석헌은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면서 38선을 넘을 결심을 했다.

박승방이 '선생님을 월남시켜야겠다'며 함석헌을 찾아오기 이전 일이었다.

필자가 함석헌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풀리지 않는 점이 바로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라고 스스로 했다는 이 말이다. 도대체 함석헌이 탈북(?)을 감행하려 하면서 남한을 일컬어 '아주 쉴 곳'이라 했는데, 도대체 함석헌에게 있어 그 '아주 쉴 곳'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이제까지 함석헌의 사상의 궤적(軌跡)을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그의 사전엔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그는 생각하기 위해 생각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가 60이 넘어 만난 퀘이커의 '깊은 종교성'에 대해 말하면서 '퀘이커의 참 좋은 점이 끊임없이 참을 찾아가는 데 있다'면서 '퀘이커도 자기 자신들을 찾는 이(Seeker)라고 부른다'고 말한 사실이 있지만 함석헌이야 말로 님, 님의 뜻을 찾아가는 순례자였다.

함석헌은 종교와 사상에 있어서만은 어떤 경우에도 '이거다' 하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제 찾아가려는 곳을 '아주 쉴 곳'이라 했을 때, 그곳을 하나의 유토피아로 인식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한 땅에 들면 일체의 역사적인 혹은 공적인 살림은 단절하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 아니다. 다 버려도 함석헌에게 버릴 수 없는 것 하나가 있다. 역사라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에게 함석헌은 곧 하나의 역사였으니….

그랬다. 함석헌은 분명히 하나의 역사였다. 역사의 배후엔 한 절대의 뜻, 의지가 작동한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한다는 기독교의 신앙고백도 같은 말이다. 필자가 함석헌을 말하면서 '함석헌 자체가 역사였다'고 감히 말하는 것은 그의 90년의 삶(生)이 철저히, 처절하리만큼 그 절대의 뜻에 이끌려 산 것이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을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 그가 절대의 의지, 절대의 뜻에 붙들려 살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그가 찾을 남한을 '아주 쉴 곳'이라 했을 때 이제는 역사적인 삶을 벗어버리리라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함석헌의 그 '아주 쉴 곳'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디였을까? 그것은 함석헌의 바닥살이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필자는 감히 단언한다.

첩자노릇을 강요하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함석헌이었지만 함석헌에게 있어 또하나 견딜 수 없는 아픔은 자신을 멀리만하는 이웃이었다. 함석헌은 이웃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를 '지식의 죄'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섯번째 감옥살이 50일을 살고 나와서는 이제야말로 흙 속에, 풀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살기로 맘 먹었지만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품앗이를 하려해도 마을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웃사람들이 함석헌을 글 공부하는 사람, 세계니 뜻이니, 사상이니 하는 자기들과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모두를 열어놓고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들이었다. 함석헌은 후에 그때를 말하면서 '지식이라는 죄가 그렇게 큰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제 함석헌이 말한 그 '아주 쉴 곳'이란 분명해진다. 글이 없는 세상, 글이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한 것이다. 글은 글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혹독하게 나눈다. 돈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사이보다도 더욱 강고한 격차를 갖는다. 우선 그들이 갖는 말이 다르다. 그래서 오는 것이 소위 소통의 부재라는 것이다.

함석헌이 홀로 말한 이 '아주 쉴 곳'이란 글 아주 없는 세상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만민이 그저 하나로 엉켜 사는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주 쉴 곳'이란 민중세상, 민중의 대동세상을 말한 것이다. 민중세상! 함석헌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산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때문에 함석헌은 역사의 지극한 사랑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이른 곳이 민중세상, 그가 스스로 말한대로 아주 쉴 곳이었으니 말이다. 교수도, 신부도, 목사도 아닌 율사(律士)도, 서사(書士)도 아닌, 내놓을 것으로 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맨 사람! 그것이 3,40대의 함석헌의 말로하면 쌍놈이요, 5,60대의 말로하면 민중, 70대의 말로는 씨알, 함석헌의 아주 쉴 곳은 그곳이었다.

이 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민중을 위해 이 땅에 왔고, 그 민중을 이 땅(역사, 과거·현재·미래)의 주인으로 모셔냈다.

스승 함석헌의 월남행을 위해 체포와 투옥까지를 결심하고 함석헌과 월남-서울 입성까지를 마친 박승방은 이제는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선생님, 선생님의 건승(健勝)을 바랍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박승방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함석헌은 손수건을 꺼내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었다. 아∼ 승방아.

함석헌 '아주 쉴 곳'(?)에 이르다


서울에 이른 첫날, 함석헌은 오류동에 살고 있는 송두용을 찾았다. 송두용은 1904년 생으로 함석헌 보다는 세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은 피차 선생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송두용은 함석헌과 동경유학의 동기요, 김교신과 더불어 이른바 내촌 성서학당의 신우(信友)지간이었다.

다음날 송두용은 10여 명쯤의 열심있는 무교회교우들의 모임을 주선했다. 한자리에 들어 무교회 특유의 고요의 시간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송두용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큰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북에서 이남으로 옮겨진 날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그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참석한 이들 중 두 서너 사람은 개성 등지에서의 모임에서 이미 함석헌의 설교(?)를 들은 바 있어 알고 있었으나 참석한 이들 중 대부분은 이북에 함석헌이라는 큰 스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으나 대면은 처음인 이들이었다.

무릎을 꿇은지 이미 한시간이 가까웠는데, 무릎을 꿇은 채 아주 꼿꼿한 자세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있는 함석헌의 모습은 바로 깊은 구도자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그날 함석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밤을 송두용의 집에서 지내고 이튿날 함석헌은 자하문 밖의 평생의 스승 유영모를 찾아갔다.

송두용 쪽으로부터 함석헌이 월남하여, 내일은 선생님을 찾아뵙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영모는 새벽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온 집안을 쓸고 닦고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함 형이 온다니…. 아, 함 형이….”

열한살 손아랫 제자 함석헌을 유영모는 일찍부터 '함 형'이라 불렀다. 물론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일평생 유일한 '선생님'이셨고. 유영모는 함석헌을 자신의 한 '담벽'이라 했다. 물론 후에 유영모는 그 담벽이 넘어졌다 했지만 말이다.

“내게 좌우 두 담벽이 있었다오. 들어보오. 그런데 그 두 담벽이 다 무너졌다우” 했다.

오른편 담벽이란 오산학교 교장으로 그의 선임자였던 이승훈을 두고 한 말이었다. 넘어진 담벽론(論)은 장을 달리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어쨌던 유영모에게 함석헌은 그의 담벽이었다. 함석헌을 제자로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유영모의 양 어깨에는 함석헌의 무게가 잔뜩이 느껴져 왔다. 한없이 큰 제자, 한없이 큰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함 형, 나와 여행좀 하지 않겠소? 친구가 될만한 좋은 사람들이 있소이다. 사람들 찾아 여행좀 해보는게 어떻겠소?”

유영모는 생각했다. 함석헌과 함께 만나는 이들마다 정말 좋은 함석헌의 날개들이 되어줄 것이라고. 유영모가 생각한 사람들 중엔 전남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이 있었고, 조금 더 젊은 오북환이 있었다. 이들이 함석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의 세상을 끊고 사색, 극기, 정욕과의 싸움을 싸우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유무의식리에 신격화(?)되는 함석헌


어쨌던 함석헌은 유영모와 함께 사람 찾아 한달여 전라도 일대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특별한 대접을 받고 다시 오류동의 친구 송두용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다시 함석헌에게 피할 수 없는한 큰 사건이 발생한다.

'아주 쉴 곳', 글 없이 말(대중에게 하는 말)없이 살곳으로, 순진한 맨 사람으로 살곳으로, 그래서 자신 역시 더하고 덜할 곳이 없는 민중으로 살리라며 찾아온 남한인데 주변의 사람들은 전혀 달랐다. 만나는 이마다 '선생님'이었고, 만나는 이마다 '그냥 계셔서는 안됩니다'였다. 이미 알려진 말이지만 '저울이 북에서 남으로 기울었다'느니, '말씀이 북에서 남으로 왔다'느니 하면서 의식리에 무의식리에 함석헌은 주변으로부터 신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함석헌은 진실로 월남 이후의 살림이 '아주 쉴 곳'이기를 원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러시아의 군사주의, 북한 공산당의 독제의 압박에 꺾여서가 아니었다. 민중대동의 세계야 말로 정말 쉴 곳,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새 믿음 같은 것 때문이었다. '아,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었는데' 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데 함석헌이 아는 것은 종교와 역사가 전부였다. 두어달쯤 지나서였다. 어떤 주일날, 무교회 정기예배가 끝나고 요즘 같으면 광고시간이었는데, 그 모임의 지도자격이었던 송두용이 '교우님들께 알려드릴 말씀이 있다' 하곤 한참 뜸을 드리더니, '그동안 저를 위해 수고해온 권정님 교우께서 이후부터 함석헌 선생님 시중을 들기로 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후에 이 무교회 출신으로 정신의학자로 널리 알려지는 김해암은 권정님을 송두용의 혹은 함석헌의 '다보테(Devotee)'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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