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39)-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로마 교구가 주도하는 라틴교회는 차츰 그들의 독자성을 확보해 간다. 그들은 제1차 니케아회의(AD 325∼)에 대의원 파송에서 소극적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교리사상을 지켜내는 뚝심을 발휘했고, 제3차 에베소 공의회(AD 431년) 때도 불확실한 교리학 배경을 지닌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를 원격 조정하여 그들에게 버거운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꺾어, 이단정죄 추방을 하였다.

그리고 제4차 칼케돈 공의회(AD 451∼)에서 라틴 사학에 기초한 일명 '칼케돈 공식'을 창출해 냄으로 견고한 로마식 라틴 기독교를 출하하게 된다.

아리우스가 게르만족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전파하여 정통 기독교의 나갈 길에 큰 장애가 되고 있을 때, 제1차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정죄하여 파문시켰을 때에도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적극 보호하는 아리우스파를 정죄 추방하는데서부터 라틴파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칼케돈 공의회 로마교구 대주교(교황) 레오 1세는 라틴교구의 신학이 매우 성숙했음을 자부하고, 그들의 5세기 중반이후 교리적 탐구와 신학발전을 위하여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틴, 곧 로마교구의 기독교는 일찍이 그리스 계열의 신학 보다 북아프리카 태생으로 그리스어 중심의 로마제국에서 라틴어로 글을 써온 터틀리안이나 키프리안과 같은 탁월한 인물들을 통해서 아리우스나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극복해낼 힘을 얻었다.

그러나 라틴파 기독교는 또다른 고민이 있었다. 토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파를 제어할만한 힘의 능력이 부족했다. 라틴파는 키프리안이 세상을 떠난지 한 세기가 넘도록 탁월한 신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어거스틴 등의 인물들이 나오기까지 성경해석이나 교리학 논증을 해낼 인물이 없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m)가 있었으나 그는 그리스어의 대가로서 동로마 기독교식 사상가로 분류되기에 라틴신학 계열의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라틴계열이 갈망하던 인물이 4세기 말부터 등장한다. 제롬(Jerom e),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us)이다.



1. 제롬(Jerome)


AD 331년 달마티아(오늘의 유고슬라비아) 지방 스토리돈의 지주 가문출생인 어려서부터 로마로 건너가서 문법, 수사학, 라틴문학의 고전을 전공했다. 그는 문필가, 언어학자, 거리낌 없는 달변의 논쟁가로서 고대 라틴학파가 배출한 위대한 학자로 분류된다.

로마에서 제롬은 유능한 친구 아퀼레이아의 티라니우스 루피누스(AD ?∼410년), 제롬은 루피누스와 함께 오리겐의 저술들을 체계적으로 번역하였다. 제롬은 금욕적 생활을 하였고, 루피누스가 그의 사생활까지 공유하는 우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리겐 사상을 놓고 심히 다투기도 하였다.

제롬은 자기 문학과 금욕생활 속에서 피곤을 느끼고 한동안 그의 고향으로 가서 생활했으나 달마티아와 아퀼레이아 지방에서 지냈으나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는 수리아 안디옥으로 갔다. 그는 금욕생활에서 오는 허약해진 몸으로 결국 병을 얻었으나 더욱 금욕생활에 몰두하였고, 안디옥 북쪽지역 광야로 나가서 많은 수도자들과 어울려 생활했다.

자만심 강하고, 화를 잘내는 성격의 제롬은 은자들과의 생활을 하면서 몸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제롬은 AD 376년경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AD 37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즉위하던 해 제롬은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오리겐의 설교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AD 382년 로마로 돌아온 제롬은 다마스스 대주교(교황)의 비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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