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평생을 함께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던 성산 장기려 선생(왼쪽 두번째)과 함석헌 선생(왼쪽 세번째).


1948년 YMCA 시민강좌, 민중 앞에 선 첫 발
민중 속에서 자신 재발견 “지식이 죄일줄이야”


무교회의 일요 예배


1947년 3월 17일 '아주 쉴 곳'을 찾아 남하한 함석헌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은 쉴곳이 아닌 오히려 '격전의 땅'이었다.

“글을 잊자, 글을 덮자, 내가 그 글 때문에 맨 사람들의 동무가 못되는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또 글이냐?”

함석헌은 바닥에 사는 민중들 앞에 지식처럼 큰 죄가 없었다면서 글 없는 세상을 생각하며, 이제는 정말 글 없이 흙속에 사는 바닥살이들과 평생을 함께 하리라며 사선을 넘었는데….

넘어와보니 너무 아니었다. 글 없이 살자며, 글 없이 살곳 찾아온 것인데 와보니 글로 사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오늘은 큰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북에서 이남으로 옮겨진 날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함석헌을 신우들에게 소개하는 송두용의 인사말이 그랬으니 다른 길이 있다해도 함석헌에게는 오직 그 한 길, 말씀 전하고 글 쓰는 일만이 운명처럼 그 앞에 놓여 있었다.

월남하여 두서너 달 송두용의 집에 동거하던 함석헌은 열심있는 한 무교회 교우집으로 그 거처를 옮기게 된다. 송두용 집에 머무는 사이 수일 후엔 뒤이어 월남에 성공한 최진삼이 합류하게 되고, 찾아오가는 신우들, 동료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좀 더 넓은 공간이 요구되자 때마침 큰 기와집을 부부 단둘이 지니고 있던 노연태의 요청이 있어 거처를 그의 집으로 옮기게 된다.

따라서 이제까지 송두용이 주관해오던 무교회 일요예배 모임도 노연태의 집에서 갖게 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함석헌이 인도하게 됐다. 이래서 소위 함석헌이 팔자에 없는 한국무교회 대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함석헌은 그가 아주 쉴 곳(?)으로 찾아온 남녘에서 1947년을 마감하고 1948년 새해를 맞는다. 함석헌에게 있어 이 1948년은 1955년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해였다.



열린시민 성서 강좌


1948년 당시 YMCA 총무였던 현동완으로부터 서울역앞 철도관사에서 진행중이던 〈열린시민강좌〉의 정기강의 강사요청을 받아 수락한 해이고, 1955년(겨울)은 사상계 사장 장준하와 숭실대학의 교수이면서(철학) 당시 사상계의 편집주간으로 있던 안병욱의 방문을 받은 해로, 바로 다음달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저 유명한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하는 해이다.

서울역 앞 철도관사에서 진행됐던 YMCA의 그 열린 시민강좌는 이미 오래전부터 함석헌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영모의 강좌가 진행되고 있어 아주 자연스럽게 두 사제간의 강의가 오전, 오후로 번갈아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함석헌이 순수한 씨알로 민중 앞에 서게 되는 최초의 사역(使役)이었다.

이미 오산교단을 떠난지 10년이 흐른 이제이지만, 이때로부터 1989년 2월 4일, 그가 88세의 나이로 이 땅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오직 하나 씨알만을 위한 삶을 살고 간 것이다.

YMCA 시민강좌를 시작하게 되는 이 해, 1948년은 함석헌에게는 또다른 기쁨이 있었다. 이제까지의 온 생을 오직 함석헌을 위해 살아온 아내 황득순과 차남 우용(寓用)이, 은삼이, 은자, 은주, 은선이 네 딸이 월남에 성공해서 비록 남의 집(?)에서일 망정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는 물론 큰아들 국용(國用)이와 큰딸 은수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품고 살아야 했지만….

48년 가을 서울역앞 철도관사에서 진행되던 YMCA 주간시민 강좌는 종로의 화신백화점 옆 YMCA 본 건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이 강좌는 '聖書讀解 咸錫憲'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정말 고마운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다.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그야말로 위로였다.

1940년 1월 1일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 개최된 성서조선 겨울모임에서, 함석헌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미래를 설파했을 때, 그 모임을 주관한 김교신이 “마치 근원이 풍성한 샘에서 표주박으로 생수를 퍼내어 마시게 해주는 것 같다”고 논평했던 대로의 그 후련함이 이제는 더해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정말 하늘의 말이었다. 늙은이, 젊은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아, 어, 오를 토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함석헌의 말을 듣고나면 훤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발걸음들은 마치 새술에 취한 듯 했다.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온 것일까? 또 그 말이라는 것을 인간만 갖게 된,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현존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작가 만프레트·마이는 “인류의 언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는 아직도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나 함석헌의 말을 참참히 듣노라면 말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를 깨닫게 된다. 물론 희미한 정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말이란 궁극적 실재, 절대의 의지, 영원한 뜻을 찾는 몸부림에서 시작됐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문에 말은 이후로도 발전해 갈 것이다.

그 궁극적 실재, 절대의 의지, 영원한 뜻에 가까이 갈수록 더 큰 말이 나오게 될 것이며, 더 큰 말이 나올수록 그 궁극적·우주적 실존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주사의 구원을 위해 큰 말, 참말이 요구된다. 적어도 함석헌은 그 말을 하는 자로 여기, 우리에게 온 것이다.



6·25의 예언


1950년 6·25가 터지기 바로 일주일 전, 6월 18일 함석헌은 꼭 일주일 후에 있게 될 세계사의 비극으로 이 땅에서 벌어지는 6·25를 정확하게 예언한다(?).

6월 18일, 이날도 역시 함석헌은 말하는자로 YMCA 강단에 섰다.

“지금 화산은 속에서 불길을 뿜어대고 있는데 그 정상에서는 살짝 덮여있는 이 지각(地殼)이 언제 터질줄도 모르고, 왜들 이렇게 까불고만 있는지 참 답답해. 답답해.”

그날, 바로 그 강좌에 참석해서 말하는 자의 말을 경청하던 김용준(고대 부총장 명예교수·화학)은 후에 이런 말을 남긴다.

“물론 그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6·25를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은 아니셨겠지만 여하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동족상쟁의 쓰라림을 남겼으며, 나 개인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긴 6·25 사변이라는 전쟁의 몇 해를 보내면서 나는 선생님의 그 예언자적인 말씀을 되새기곤 했다.”

한국의 저명한 화학자인 김용준은 후에 “화학 말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함석헌 선생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예언의 예언됨은 예언한 내용이 어떤 의미가 아닌 사건이고, 그리고 그 사건이 정확하게 적중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정리된 논리이다.

함석헌은 1960년대에 들면서 싸우는 평화주의자, 들사람, 신천옹(信天翁), 한국의 간디 등 여러 닉네임을 갖게 되는데, 이 외에 빠지지 않는 이름이 '한국의 예언자'라는 것이었다. 예언의 특색은 받아서 전한다는 데 있다. 함석헌의 말이 예언으로 들려지는 것은 그의 말이 받아서 전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18일, 그 6·25의 예언(?)에 이어,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 하는 이사야 30:15절 말씀으로 힘을 나누며, 믿는 무리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기 동안 함석헌은 1953년 휴전협정으로 다시 상경하게 되기까지 대구에서, 김해에서, 부산에서 머물게 되는데, 피난 후 1년 동안은 회개의 해로 살게 된다.


회개의 홀로살이 1년을 지나…


6·25 사변이 터지기 전 주일, 그의 성서강해 시간에 모였던 식구들에게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이사야서의 기록을 함께 찾아 읽었던 자신이 오히려 난을 피해온 것은, '아니라, 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30:17)' 하고 도망한 무리들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회개의 홀로살이 1년을 보내고 다시 말하기를 시작한다. 그때 부산에는 장기려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20일 평양을 탈출하여 부산에 도착, 의무장교로 제3 육군병원에 배속되어 근무중이었다. 장기려는 함석헌이 김해 대저면에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마자 병원에 입원중인 상이병사들을 격려하는 모임을 만들고 강사로 청빙했다.

전란중의 피난지 부산이 함석헌에게 또다시 말씀의 자리를 제공한 것이다. 함석헌의 '말'이 소문나면서 피난 수도의 여러 대학들, 병원들, 마산의 요양소 등까지 함석헌은 쉴새없이 '말씀'을 전했다.

함석헌이 사랑하는 제자 중에 김복영(金復永)이 있다. 김복영은 그의 자서전 기록을 통해 정말 재미있는 '말씀의 사람' 함석헌을 전하고 있다. 그 피난지 부산에서의 어느날, 적지않은 일행이 한 떼를 이루어 김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알아보니 한참 있어야 차가 온단다.

모두가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디선가 거적대기 같은 것을 가지고 오셔서 땅바닥에 펴고 홀로 행길가에 정좌(正坐)하고 몸을 약간 좌우로 흔들며 무엇인가를 골돌히 생각하는 모습이 흡사 점쟁이 할아버지 같았으며, 나는 그 순간 원효(元曉)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가 머리를 스쳐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언제 어디서나 남의 눈 꺼리지 않고, 마음대로인 분이다”(남기고 싶은 信仰告白 p.38, 도서출판 태봉 2009).

그렇게 그는 생각하고, 생각 난 것을 쓰고, 쓴 것을 말했다. 김복영이 전하는 대로 그의 생각은 길가에서, 시장에서, 산과 들에서, 삶의 현장에서 계속 되갔다.



함석헌의 글과 민중


“지식이 죄인줄을 이전에는 몰랐었다”라는 함석헌의 고백은 자신을 민중 속에서, 현실적으로 버려진 것들 속에서 재발견함으로써 한 말이었다. 천지를 뚫는 지학식(知學識)을 갖는다해도 민중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일 때 그것은 민중의 고혈(膏血)을 빠는 독아(毒牙)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도 함석헌은 유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글 공부는 예외없이 그로 하여금 민중을 찾아가게 하는 나침판이 되고, 그가 찾아 만나는 민중은 그의 지적 열정을 더하게 했다.

이제는 50을 넘은 나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도없이 '차라리 글을 버리자' 하면서도 지나고 보면 그 글로 해서 자신이 민중에로 접근되고, 민중과 엮어져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함석헌이 거의 혈투에 가까웠다고 하리만큼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글을 외우고 했던 것,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글을 통해 민중과 동호흡을 할 수 있어서였다.

그는 그의 생을 마치기까지 무명으로 만든 책자루를 들고 다녔다. 그러면서 그는 1970년 그의 종교, 사상, 철학의 핵심으로 밝혀지는 '씨알'을 준비한 것이다. 이제 새 싸움이 함석헌 앞에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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