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40)-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다시 제롬은 여생의 마무리를 위한 예루살렘을 선택한다. 그의 친구인 파울라와 그녀의 딸 예우스토키움이 그곳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하나 지었다. 하나는 파울라가 직접 관리하는 수녀원, 또 하나는 제롬이 지도하는 수도원이다. 제롬은 여기서 성경 주석과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하면서, 차츰 그의 옛 스승이기도 한 오리겐에 반대하는 학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제롬의 옛 친구인 루피누스와의 관계가 대립으로 치달으며 둘의 논쟁은 오리겐이 가진 사상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으로 흘렀다.

제롬의 역작으로 그의 이름을 천세에 빛나게 한 불가타(Vulgate) 성경은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과 복음주의 개혁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2. 히포의 어거스틴


제롬과 동시대 인물로서 히포의 어거스틴을 소개한다. 그는 AD 354년  11월 13일 누미디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베르베르어가 중심을 이루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증산층이었다. 그의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이교도였으나 모친 모니카(Monica)는 중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부모의 교육의지를 따라서 카르타고에서 문법 등 중요한 라틴어 고전작품과 수사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는 변호사나 수사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373년경 당시 그 지역에 많이 퍼져있던 마니교에 빠져들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줄기찬 권고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384년경까지 마니교의 포교사 활동까지 하면서 자기 인생의 방향을 확정하지 못했다. 여인들과의 사생활, 사생아 생산 등이 얽힌 그의 중년기는 위태롭기까지 했다.

밀라노 암부로시우스 감독의 설교에 붙잡히기 시작한 그는 386년 세례를 받았다. 평생 아들의 회심을 기다리던 모니카는 어거스틴을 아프리카로 보내고, 어거스틴이 남긴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오스티아로 갔다. 어거스틴은 주로 여행을 하면서 자기 신앙과 신학을 가다듬었고, 곧이어서 그가 신봉했던 마니교 비판의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다. 그리고 여생을 묵상과 철학탐구를 위한 삶으로 이어볼 생각이었다. 그가 AD 391년 누미디아 지방 히포 항구에 도착했다. 히포의 신자들이 어거스틴을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자기들을 지도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지방 발레리우스(Valerius)에 의해 장로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AD 395년 발레리우스 감독이 사망하자 어거스틴이 그 직무를 대신했다. 어거스틴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어거스틴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는 도나투스주의(Donatism) 문제의 해결이었다. 누가 책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었다.

도나투스 기독교는 로마교회와 상당한 거리에 있었다. 비록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졌다 해도, 배타적이고 청교도적인 집단으로서의 도나투스파가 얼마나 보편성을 갖느냐에 따라서 향방이 갈리게 되어 있었다. 당시 정통파를 자처한 로마교구(로마 가톨릭)도 도나투스 파의 눈에는 교회대접 받기가 어려운 집단이었다.

도나투스 파가 지켜본 로마교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시대에 거축한 책들을 당국에 넘겨줌으로써 배교자가 되었던 주교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올 뿐 아니라 현재로 로마의(권력) 당국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염된 교회, 버림받은 교회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어거스틴 시대에 이르러 로마교회와 도나투스 파의 상호 적대감은 확고하였다. 따라서 도나투스 파에 의하면 로마교회는 전혀 교회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도나투스 파는 로마교회가 준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로마교회 신자들이 도나투스 파에 가입할 경우 반드시 그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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