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집터 현장. 3년 전에는 들어갈 수 있었던 이 터는 현장보존을 위해
 수년 전부터 안전시설로 관리하고 있었다.


[조효근 목사의 탐사여행 (3)]

   1. 아제르바이잔
   2. 그루지아
   3. 아르메니아


트빌리시. 오후 2시 예배를 인도하고 곧바로 오토가르(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루지아의 트빌리시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맑다. 청옥색, 군무를 이루며 학의 무리가 날아가는 듯 구름떼가 내 눈길을 어지럽힌다.

오후 3시 50분 그루지아 트빌리시를 떠나는 버스는 다음날 오후 4시쯤 터키 앙카라에 도착 예정이다. 버스는 그루지아 국경을 지나서 터키의 스트라브존을 지난다. 우측으로 흑해를 끼고 간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는 문명의 황금기를 걸었던 도시다. 지금도 아름답다. 차에서 내려 한나절 쯤 놀다 가고 싶으나 차가 나를 이끌고 간다. 아침 7시 삼순까지 144킬로미터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았다.

삼순.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흑해를 배경으로 삼순 항에 상륙한다. 군사혁명의 서곡이요, 무너지는 오스만투르크와 함께 망할 수 없다는 또다른 투르크인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된 오스만투르크의 군복을 벗어버리고 터키공화국을 목표로 영국 등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삼순을 지나서 오후 3시 30분 앙카라에 도착했다. 인터콥 전 베드로 님의 안내를 받아서 곧바로 앙카라 고대사 박물관으로 달렸다. 섭씨 38도의 더위를 뒤로하고 고대사 박물관을 살피고, 베드로 님의 센터에 와서 화장실에 마련된 간이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국수 한그릇 맛있게 먹었다.

우리의 목표인 에뎃사(현재 지명 산르우르파)로 가기 위하여 가지안텝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아침 7시. 10시간의 버스여행이다. 곧바로 에뎃사 행 버스를 갈아타고 3시간 동안 고행을 통해서 10시 30분 에뎃사 오토가르에 도착했다.


  터키 고대사 박물관 현관에 세워진 네스토리안 교단 십자가 모형의 돌비. 그 옆은 필자.

37시간의 버스여행이다. 아침겸 점심을 먹었다. 경찰관의 도움으로 일단 에뎃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오늘 에뎃사의 날씨는 섭씨 39도. 바베큐 되는 듯한 찜통더위를 뿌리치고 우리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고대사 박물관에 가서, '역사연구소'의 위치를 안내받았다. 1, 2층을 살피면서 '에뎃사'의 영광된 날을 찾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에뎃사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고, 그때 역사기록은 AD 280년경에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 먼저 '기독교 국교선언'을 했다. 로마보다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접경지에서 한때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기도 했었다. 에뎃사 현재 터키의 남부 하란과 시리아 접경지로 페르시아 방향의 위치로 볼 수 있다.

에뎃사의 지형은 (수리아)안디옥에서 페르시아 방향으로 수평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다. 수평거리로 크게 멀지 않은데 두 지역은 기독교의 동과 서를 나누고, 아시아와 유럽의 전진기지 성격을 가진다. 먼저 안디옥은 바울 사도의 유럽과 아시아 선교의 출발지였고, 바울은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역사성을 가진다. 안디옥은 바울이 2차, 3차 전도여행 과정에서 장차 유럽 기독교의 기반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에뎃사는 AD 280년도에 아르메니아 제국의 국교화를 이룬 것처럼, 바울보다 먼저 아시아 또는 동방선교의 붐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페르시아(이란)의 영토이지만 타브리즈, 우르미에 등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르메니아 제국의 영토였다. 그때 타브리즈 지역이 다데오의 선교지였다. 지금도 유월절 기간에 다데오파(?)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 기독교 한 분파가 모인다.

예수께서 직접 활동하실 때, 이 지역 왕이 병이 들어 예수 소문을 듣고 초청 서한을 보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그때 이 지역에 예수님 대신 왔던 제자가 다데오였다는 전언이 있다. 다데오 등의 제자들은 이곳에 선교를 하고, 아라랏산 저편, 현재 국명 아제르바이잔에 선교를 했고, 12사도 중 순교한 인물이 바쿠에 순교지를 남기고 있다.

곧이어서 도마 등의 전도자들이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로 갔던 아시아의 길 중심지가 에뎃사이다.
필자는 에뎃사에 여러번 찾아왔었고, 금번은 <&08302>은 터키여행을 겸하고, 또 선교사 2명과 동행한 길인지라 여행이 간편하지가 않다. 그러나 에뎃사 역사연구소를 방문하고, 전문가들과 얼마간의 대화를 나눈 것이 소득이 되겠다. 명년 5월에는 일주일 정도 민박을 하면서 더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볼 계획이다.

일단, 하란의 아브라함이 살았던 옛집을 방문했다. 1년 전 왔을 때와 지형이 변경되어 있다. 공사중이다. 관광지 다듬기인 듯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집터가 사실상 없어진 것 같아서 비중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4천여년 전 아브라함 일가의 하란 체류 지명이 아브라함의 동생 이름인 것으로 보아 그의 부친 데라가 아브라함 보다 하란에 대한 신뢰가 더 했던 것일까.

또한 갈데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동행한 그의 부친 데라가 하란에서 죽는다. 그렇다면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브라함 독단의 혁명이 아니고 그의 부친이 주도하는 가족 이민 성격이 되기도 한다.



         에뎃사·아르메니아 시대의 역사자료가 집중 보관된 고대사 연구소.


가까운 곳에 시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이 있어서 조심스럽다. 아브라함 시대의 주거지역을 본다. 개미집들처럼 보인다. 이날 하란의 날씨 39도니까 땀으로 범벅인 몸 아무 곳이나 주저앉고 싶어서 주변을 살피니 뭔가 하나가 마음을 연다. 안체는 들여다볼 수 없는 무슬림들의 규칙이다.

바깥마당에 풀어놓은 양, 토끼, 개, 닭 들 틈바구니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욥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서 길을 잡아볼 참이었다. 일행과 함께 계산하는 시간이 모자란다. 우리는 에뎃사 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부르사 시에 가고, 그곳에서 니케아 호수 방문을 하기로 되어 있다.

부르사에 가면 셀죽 투르크의 도시를 만나고, 제4차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당한 동로마 제국이 쫓겨나서 살았던 70년 가까이 부르사 시대의 행궁이 있다. 그곳을 보고 니케아로 간다. 제1차 니케아회의(AD 325년)가 열렸던 현장을 보고, 칼케돈으로 가서 제4차 종교회의(AD 451년) 현상을 살핀 후, 배를 타고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일정을 마치게 되어 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야 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쉽지가 않다. 욥의 무덤 가는 길, 니므롯 산언덕 또한 포기하기로 했다. 시내로 갔다. 시내 중심가를 가서 환전을 했다. 분위기 좋은 식당으로 가서 케밥으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영 긴장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 터키에 처음 온다는 선교사님 두분께 만족을 드려야 하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많이 유쾌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음날 우리는 역사박물관, 그리고 점심시간 직전에 '고대사 연구소'를 방문했다. 우리의 간청을 받아들여 직원들이 자료실에 들어오기도 했고, 다행히(?) 연구소장이 휴가중이라며 그가 연구하는 고대서적을 잠깐 살피는 배려도 했다. 빨갛고 파란줄이 그어진 책들 속에는 구세기 에뎃시절 자료도 많았다.

카메라에 담아보고, 표지촬영도 해서 후일에 자료확보할 준비도 했다. 번갯불에 콩구어 먹는다고, 자료를 찾고 있는 내 모습이 야밤에 남의 집 털고있는 도둑같다는 생각을 불쑥 했다.

다시 우리는 노천식당으로 갔다. 간단한 케밥, 그리고 곧바로 버스터미널로 갔다. 무조건 부르사 행 버스에 올랐다. 꼬냐에 내려서 메블라나 루미의 이슬람 사원에 들르고, 꼬냐 첫번째 예배당을 살펴볼 사전계획을 포기하고 부르사로 달렸다.

18시간. 에뎃사에서 오후 3시 출발한 우리는 다음날 아침 부르사에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대강 얼굴을 씻고, 한국돈 1,500원짜리 초르바(녹두죽 같은 스프)에 그냥 주는 빵을 찍어 먹으면서 우리는 웃고 있었다. 이것이 여행인지, 대한민국 남북한 합한 영토의 4갑절이나 되는 터키 땅을 동·서·북으로 달리는 우리가 우습다. 지중해 지경의 남쪽을 제외하고는 김삿갓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초르바에 시장기를 달래고, 셀죽 투르크의 수도와 4차 십자군 공격을 피해서 행랑살이를 했던 부르사 콘스탄티노플 궁을 먼저 가느냐, 아니면 니케아(터키명 이즈닉) 제1차, 제7차 회의장이 열렸던 곳을 먼저 가느냐를 고심하다가 다 못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니케아를 선택했다.

내 경우 7회나 다녀온 곳, 제1차 니케아 회의를 열고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입석한 자리 제국의 대의원(감독들) 318명이 모인 중에 이단자 아리우스도 황제의 신임을 믿고, 18명의 대의원을 이끌고 온 니케아 회의장.
1천7백여년 전. 그리고 오늘 기독교 역사의 부침과 변천을 거친 역사의 현장에 서서 우리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분 선교사는 니케아 호숫물로 뛰어들어(불법) 수영을 하면서 영상 40도의 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이방인들을 '용서하십사' 하는 듯 수영을 즐긴다.

우리는 1차 니케아 회의장은 도시 건설 절차를 거치면서 내가 지난해까지 왔을 때에도 보존되었던 주초부분이 변형되어 있었다. 니케아 1차 회의장으로 사용했던 황제의 행궁을 복원하여 니케아 청문회를 열고 싶었던 내 꿈은 또 역사 속에 묻힌다.

제7차 회의장(지금은 이슬람 모스크) 옆 잔디밭에 마련된 간이 식상에서 우리는 다시 케밥으로 식욕을 달랬다. 니케아에서 시간을 많이 소개한 대가로 우리는 칼케돈(현 지명 카드개이) 인근 도시 이스탄불의 아시아쪽 터미널에서 차를 내렸다. 가볍게 빵으로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탔다. 칼케돈 부둣가에서 차를 세웠다. 저녁 10시. 나는 칼케돈 회의장 가까운 곳에 호텔을 잡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10시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지친 것이다. 칼케돈 회의장 터 인근에서 현장으로 가는 시간의 부족을 느꼈다. 단, 회의 장소가 보존된 것은 아니니까, 이쯤애서 멈추자고 했다. 칼케돈 회의(AD 451년)는 AD 325년 니케아, AD 431년 에베소회의 뒤를 이은 회의장이다.

칼케돈회의는 AD 431년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를 파문, 추방을 했던 이후 몇번인가 4차 회의를 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가 모처럼 열린 회의였다. 다행히 AD 444년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던 키릴루스가 죽고, 449년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서야 열릴 수 있었던 제4차 칼케돈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복권시킬려 했던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로마 교구가 마련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정돈하여 통과한 이른바 '칼케돈 공식'이 탄생한 회의로써 그 역사성이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에뎃사(현 지명 산르우르파) 지도.


우리는 이 내용들을 다시 점검하면서 뒤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를 탔다. 마르바라해를 통과하는 뱃길이 어찌나 상쾌한지 한 분 선교사는 “금번 터키 여행의 백미”라면서 활짝 웃는다.

이스탄불 소피아 예배당 앞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두 분 선교사는 이스탄불에서 그루지아 트빌리시까지 가는 32시간 버스여행, 그리고 트빌리시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까지 15시간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여행을 하게 될거다.

이것이 여행인지, 순례인지, 고행인지, 그러나 이렇게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다음해 5월 여행을 위해서 여행사 한군데 들렸다가 아타투르크 공항행 버스를 탔다. 21일만의 귀국길이다.

〈끝〉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