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월남 직후 이호빈 목사 등과 함께(앞줄 가운데 함석헌 선생).


6·25의 참화와 함석헌의 평화주의


6·25의 참화는 함석헌에겐 더할 수 없는 하늘의 선물로 왔다. 그의 역사관·종교관, 특히 국가관을 확 뒤바꾸어 놓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천정화(天定化)하게 했다는 데서 그렇다. 6·25라는 죄의 전쟁 이전에도 그의 생각 속에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함석헌으로 하여금 전쟁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한 것은 참 기이하게도 6·25로 각인된 그 전쟁이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함석헌의 가슴 속엔 월남 이전부터 반전(反戰)사상의 불씨가 거대한 폭팔을 예고하며 휘돌고 있었다. 제도권의 정치, 제도권의 교육, 제도권의 종교는 그를 험구자라, 이단자라, 반동자라, 심지어 어떤 이는 정신분열증, 이상심리의 소유자라고까지(5·16의 제2인자라는 김종필이 그랬다) 험담을 해댔지만 누가 뭐래도 함석헌은 천정(天定)의 평화주의자였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평화주의자와 다른 것은 '싸우는'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어쨌던 그의 이 천정의 평화주의, 평화심(心)은 6·25 이후부터 그의 생을 마감하기까지 반전(反戰), 반국가주의(反國家主義)에 거대한 불길로 인화된다.

필자가 함석헌에게 학문에 없는 '천정의' 평화주의자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평화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함석헌 안에 있는 이 평화심이 국가라는 것, 국가의 동맹이라는 것, 국가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는 전쟁을 서슴없이 죄라 규정하게 한다.

20명이 넘는, 때로는 30여 명에 이르는 피난식구들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함께 모여 살던 김해를 대부분 떠나게 되는데, 그 피난식구들 속엔 이미 이야기한 바 있는 최진삼, 최태사 같은 이들이 있었다.

최진삼은 알려진 것 같이 열여섯 살 나이에, 여섯 달 동안 함석헌이 교장으로 있던 송산농업학교에 입학한 후 함석헌의 계우회 사건으로 학교가 폐교되었음에도 함석헌의 정신적 아들이 되어 함석헌 사가(私家) 살림을 지켜냈고, 함석헌이 북한을 탈출해 남하하자 평양 거쳐 해주까지의 길을 동행, 함석헌의 탈출을 끝까지 돕고, 자신도 수일 후 뒤따라 월남에 성공하여 다시 함석헌의 품에 앉겼다.

그때 최진삼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함석헌도 정처없는 생활을 하는 때였다. 평생에 '밥만은 내 밥을 먹어야 한다'던 함석헌도 별 수 없이 남의 밥을 먹는 때였다. 그래도 최진삼은 함석헌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세상 눈엔 별볼일 없는(?) 최진삼이었지만 함석헌에겐 이미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드디어 1949년 10월 최진삼은 함석헌의 셋째 사위가 된다. 열여섯 나이에 함석헌을 찾아왔던 학동 최진삼이 스물여섯이 되는 해다.
명목상으로 이 최진삼과 함석헌의 셋째 딸 은자를 중매한 이가 최태사다. 최태사는 함석헌과는 오산의 선후배 사이로 1950년대, 함석헌이 피난살이를 마치고 상경한 이후, 1956년 5월 원효로에 그의 집을 지어들기까지 참으로 정성으로 함석헌을 시중했던 이다.

함석헌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오산학교에 부임하여 3,000여 평의 농장을 준비할 때부터, 농장 안에 걸쭉한 일(一)자 집을 지어 살림집과 서제, 그리고 성서모임용 강의실까지를 준비할 때는 물론, 함석헌이 주관하는 성서모임의 충실한 수강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함석헌이 송산농사학교를 인수하여 오산을 떠나게 될 때는 “선생님의 땅값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다 드리고, 우리가 인수하자”는 그의 아내의 의견이 있어 함석헌 자신이 크게 미안해 하리만큼 뒷수습을 해준 이였다.

함석헌이 남하할 때는 안내원이 군말이 없을 만큼의 많은 뒷돈을 마련해 주었고, 역시 다음 해에 남하하게 되는 그는 실력 있는 의사인데다가 유달리 이재(理財)의 능력이 있어 월남 후에도 알게모르게 함석헌의 개인살림에도 힘을 보탰다.



최태사가 이끈 함석헌의 피난길


함석헌의 6·25로 인한 피난길도 시종일관 최태사의 작품이었다. 최태사 역시 후진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이였다. 지금은 일심회(一心會)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리는 가슴뭉클할 정도의 미담을 품은 그의 제자들의 모임이 있다.

6·25가 터지자 최태사를 따르는 후진들 중 김복영(개성 YMCA 총무, 후에 개풍지(開豊誌) 주간, 함석헌기념사업회이사), 이성기 등이 찾아와 피난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냥 계시면 안됩니다. 큰일 납니다. 오늘 저녁 남하하는 화물열차가 있으니 지체 말고 떠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태사는 두 청년 제자들의 남하간청을 받으면서 오히려 함석헌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선생님을 모시고 가야지….”

최태사는 거의 강제적으로 두 청년과 함께 함석헌을 찾아갔고, 함석헌의 피난을 간청하게 된다. 주저하기만 하던 함석헌은 최태사를 잘 알고 있었던 터, 정말 최태사는 함석헌이 말을 듣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함석헌은 적지않은 식구들을 데리고 최태사를 따라 김복영, 이성기의 도움을 받으며 이미 깊은 밤,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시작된 3년여의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대부분 상경길에 오르게 되는데, 최태사는 여기서부터 함석헌과의 길을 달리하게 된다.

함석헌은 정전이 되면서 바로 서울로, 최태사는 조금 늦게 경기도 여주로 가게 되는데, 이렇게 달라지는 길은 공간(空間)에서만이 아니었다.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정전으로 상경한 후에도 함석헌이 살아야 할 집을 준비하는 일은 최태사의 몫이었다. 상경한 함석헌은 서대문 충정로3가에 거처를 마련하여 2년을 살았고, 다시 이화여대 정문 곁으로 이사를 했는데 함석헌의 아들 우용은 이때 집이 아주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집들. 충정로의 집, 이대 곁의 집도 다 최태사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선생님이 달라지셨다!


최태사 역시 큰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필자가 피난살이를 마치고 상경하면서는 “두 사람의 길이 달라졌다. 그것은 공간에서만이 아닌 '생각'이 달라진 것이었다”했는데, 최태사는 함석헌이 유영모를 말하면서 “나는 역사관이 선생님과는 달라”, “나는 이성관이 선생님과는 달라” 했던것 같이 “나는 선생님과는 신앙관이 다릅니다” 한 말을 두고서이다.

50여 년 중반을 넘으면서 신앙관 때문에 하늘도 나누지 못하리만큼 굳고 아름답게 보였던 사제의 관계가 섭섭하고, 아쉽기 그지 없는 관계로 금이 가버린 것이다. 두 사제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6·25를 계기로 급변(?)해가는 함석헌의 역사적·사상적·종교적 논리가 그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태사의 입장에서는 거의 보헤미안으로 보여지는 함석헌의 이성문제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최태사의 개인 신앙은 함석헌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입은 것이었고, 또 함석헌이 “나는 우치무라 한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내 개인적으로는 36년간의 식민살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까지 한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최태사 스스로 그 내촌에 대해 탐독한 바 있어 깊이 숭상하고 있는 터였는데, 함석헌이 달라지고(최태사의 표현으로는 '변질') 있는 것이다.

최태사가 함석헌이 달라지고 있다고 희미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한 것이 김해에서의 피난살이때부터였다. 어느 자리에서였는지 최태사가 말을 하는 자리가 있었다. 하는 말 중에 함석헌에 대해 신앙의 변질(?)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함석헌이 사랑하는 한 제자가 “최 선생님, 최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변질을 느끼기 시작하신 때가 언제부터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최태사는 지체 없이 “6·25 피난 시 김해서부터였지요” 했다. 그 제자는 후에 다시 자신의 생명이 함석헌에게서 비롯됐다는 그 함석헌에게 최태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제자는 그때를 6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한다.
그 제자는 그때 안반덕 씨알농장(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소천리 소재)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함석헌이 강원도 씨알농장에 올라와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어느 모임에서 선생님이 달라지셨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최태사 선생님 이야기였는데, 제가 최 선생님께 언제부터 선생님이 달라지셨다고 느끼셨느냐, 무엇이 달라지셨다고 느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최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특별히 달라진 점이 신앙관이다. 선생님의 신앙관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맨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김해에서 있었던 피난살이에서였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맞습니까?”

함석헌은(아주 조심스럽게) 제자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오산에 있을 때부터였어. 겨울철 성서집회에서 조선 역사를 말한(1933. 12. 31∼1934. 1. 3일까지의 강좌) 다음부터 나는 나도 걱정스러우리만큼 달라지고 있었어. 누구의 말, 누구의 글이 아니라 '내 생각'을 붙들고 씨름을 할 그 무렵은 내 독서량이 내 생에 있어 가장 확대가 됐던 때였어. 독서의 기쁨을 크게 경험한 때지. 그런데 그렇게 독서에 전 역량을 쏟아부었던 것은 독서에서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든가 또는 독서에서 오는 기쁨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가 내 스스로 생각하는 데서 갖게 되는 확신을 독서의 내용에서 재확인하게 되기 때문이었어.

동서양의 모든 경전들까지도 그 내용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이전의 내 생각, 내 말 같았는지…. 자연히 선생님들(내촌, 유영모 등…)에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지. 그러나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니었어. 나는 나여야지. 내가 나일 때 선생님들도 의미가 있는거니까. 더구나 늘 감옥에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나도 내가 두려웠던 때가 있었어.

내가 너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말야.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끊임없이 달라질 것이고….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6·25 피난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것은 사실과는 달라. 그러나 그때가 내 입을 열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순히 믿는 친구들에겐 미안한 마음이야.”
그랬다. 함석헌은 영원히 달라져가야 했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