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생각하는 사람 함석헌.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의 가슴에 한 '생의 과제'를 품고 있었다. 진리를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진리를 찾아가야 하는 과제만큼이나 그를 힘들게 하는 논리가 하나 더 있었다. 진리란 결코 붙잡히지 않는 것이라는.
'진리란 결코 사람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란 곧 그 진리를 붙잡자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빈 손이었다. 이승훈도, 유영모도, 내촌도 함석헌에겐 예외없이 내버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조직 불교, 조직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조직불교의 석가, 조직 기독교의 예수도 함석헌에게는 결코 진리일 수 없었다.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그토록 절대진리로 절규하는 구주예수, 믿음, 대속, 영생하는 것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힘이거나 논리(理)이거나(심지어 '진리'라 하는 것까지도) 함석헌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거나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천하사람들이 '절대'라 하고, '님'이라 하고, '진리'라 해도 그는 '아니' 하고, '글쎄'했다. '붙잡았다' 하는 순간 놓아야 한다. 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함석헌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는 변화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가고, 가고, 또 가야하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함석헌은 '이것이다', '여기다'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것이었다. 함석헌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라 하면서도 한국의 기독교, 특히 대교회 중심의 정통주의자들로부터 타락한 자, 이단, 지옥 갈 자 운운하는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들어야 했던 이유였다.

'그는 변했다', '그는 아니다' 소리는 기독교의 정통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 특히 무교회의 지도층 인사들까지도 그랬다. 특히 함석헌이 그의 믿음의 친구들로 '함 선생이 변했다' 하게 한 대표적인 강론이 그의 구원론, 곧 대속론(代贖論)이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속죄(贖罪)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인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인간에게 대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복음주의의 신앙의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전에 선생이(내촌감삼·필자 주) 해주었던 말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거기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체험 보다는 감정(emotion)의 도취인 것 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을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났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서도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파고드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색하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린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안되는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행동하는 도덕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든 미신에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에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라는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아닙니다. 그런즉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은 없이 대신해 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이 못일어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끝없는 문제이지만,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내 식으로 풀어버렸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예수를 골고다로 이끌어간·필자 주).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딴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내 육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자기 중심적 감정뿐이요, 도덕적으로는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죄,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전집 4, p.219∼220).



함석헌, 한국기독교계에 불을 던지다


“나도 자유하는 인격을 가진 이상 어떻게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겠느냐?”, “체험은 이성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유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신해 주겠다는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 해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라는 소위 함석헌의 이 속죄론이 말이 되는가?

예나 이제나 한국기독교로선 가톨릭에게나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용서할 수 없는 역천(逆天)이었다. 그래서였다. 개신교에서 함석헌은 개신교의 강단에 세워서는 안된다고 일사분란(?)의 결의를 했고, 심지어 가톨릭의 한 신부는 '함석헌 씨는 회개하라. 천국은 있다'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절대의 도그마로 가지고 있는 그 준엄한 '천당 지옥'까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있지도 않은 천당, 지옥 가보기나 한듯이 있다하여서 영혼 건져주마 하는 대신 이 세상에서는 개, 돼지 같은 살림에도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거세를 하며, 이리 같은 압박자들이 맘 놓고 해먹도록 해주는 대신 신교의 자유(信敎自由, 신앙의 자유는 사실 하나님이 양심 위에 주는 수밖에 없는데) 얻어가지고 실속으로는 제가 세상에서 향락하는 보장을 얻어야 하겠으니 나는 천당, 지옥은 아니 믿어도 내 양심에 내리는 하나님 명령이 무서워 그런 짓(목사, 신부 노릇·필자 주) 못한다.”

천당, 지옥을 어떤 공간으로 믿는 종교(?)의 입장에서일 경우 함석헌은 지옥에 보내야 옳다고 보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과 그 신부를 더할 수 없는 친구로 만들어준 것은 기이하게도 1972년 박정희의 유신 쿠테타였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몸으로 거부하던 두 사람은 10수년 후 몸으로 만났다.

민주, 씨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역사 신앙의 자리에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 되었고, 후에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긴 그 신부는 명동성당 안의 한 별체에서 가료를 받아야 했는데, 함석헌은 수차례 그를 찾아 손을 잡고 격려하면서 뜨거운 우정을 이루어갔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하나로 묶은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변질(?)에 우는 사람들


변해야 하는 사람 함석헌! 동경고사 유학 중에, 졸업하면 고국에 돌아가 성서조선, 성서민족운동을 하기로 깊은 맹약을 했던 여섯 동인 중 한 사람인 송두용의 추모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였다.

함석헌은 송두용 보다는 3년 연상의 나이였지만 아직 건강한 몸으로 이 동우의 추모식에 참석했는데, 이 추도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게 된 한 함석헌의 지인이 말하기를 “흔히들 아는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을 두고 다섯번 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오늘 가신 지 1주년을 맞는 송두용 선생은 일생동안 오직 한길을 걸어오신 분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함석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계시받은 절대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온 완성의 사람과 절대의 진리(?)를 붙잡기 위해 달려온 미완성의 사람이 함께 한 자리였을까? 함석헌을 두고 애증간(愛憎間)을 숨질때까지 오고간 사람이 최태사(崔泰士)일 것이다. 그는 일부러 틈을 내어 함석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을 위한 그의 기도는 6·25를 계기로 해서 그 내용이 전혀 달라지고 있었다. 최태사의 기도는 순수했다. 그는 중심을 기울여 오산시절의 함석헌(내촌의 함석헌·필자 주)이기를 기도한 것이다.

최태사는 내촌의 대속사상, 십자가의 은혜, 구원을 입은 자의 내적평화와 자유를 철기둥처럼 신봉하는 무교회의 신자였다. 그 신앙의 51%는 함석헌에게서 온 것이었고. 그런데 '선생님이 딴소리 하신다!' 아, 그것은 최태사에겐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최태사의 생각엔 선생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누리시고 계실까 의심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 선생님이 주님께로 돌아오셔야 하는데….'

최태사는 선생님의 타락(?)에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냥 달라져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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