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가 부친 콘스탄티우스의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 부황제 뒤를 이어 젊은 나이에 부황제에 올랐다. 더구나 순번제로 정제(正帝)에 오르는 혜택까지 덤으로 받아 곧바로 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변방의 젊은이가 갑자기 부황제도 아니고 (정)황제가 되려하니 라이벌이 생겼다. 그 이름이 막센티우스 로마 본토의 부황제였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결코 황제의 자리를 내줄 수 없었다. 해결책은 전쟁 뿐이다. 두 영웅이 정치생명 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걸고 한판 붙게 되었다. 막센티우스는 밀비안 다리를 폐쇄시켜 버리는 결단으로 일종의 배수진을 쳤다.

콘스탄티누스는 더 큰 모험을 결단했다. 십자가 군기를 내걸었다. 훗날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견해가 각각 다르다.

당시 300년 카타콤 시대를 승리로 이끌고 있던 기독교는 로마제국 10% 이상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황제가 볼 때, 자기 휘하에 누가 크리스천인지 가늠해 볼 수 없었다. 황후가 신자인가? 황태자? 공주? 원로원 실력자? 유력한 군단장급? 당시 로마는 신흥 기독교 세력 앞에서 떨고 있던 때였다. 어떤 역사학자는 몇 년, 또는 몇 달만 더 밀어부쳤으면 콘스탄티누스의 도움이 없이 기독교는 로마를 굴복시켰으리라고 했다.

필자는 콘스탄티누스와 당시 기독교 실력자들의 밀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더 많은 지면을 요구하니 뒤로 미뤄두자. AD 313년 밀란칙령으로 '기독교 자유령'은 고맙지만 AD 325년 니케아회의 전과정을 보면 그의 사심이 나타난다. AD 337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례를 미루는 불투명한 그의 신앙고백도 의심해 볼 수 있다.

또 기독교 고유성이나 순수성에 상처를 낸 점, 더구나 그 자신이 '사도급'에 준하는 예우를 요구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콘스탄티누스는 고도의 정치감각을 가진 황제로서 스토아 철학 몰락기에 신흥 기독교를 기반으로 새로운 로마를 꿈꾸면서 그의 야망을 성취했다. 기독교는 또 기독교대로 고난을 인위적인 축복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자유령(AD 313년), 그리고 데오도시우스의 국교령(AD 392년)으로 이어졌지만, 로마의 기독교는 너무도 빨리 변질되었다. 이는 그들이 권세와 명예를 동반한 지상천국 같은 생활을 로마제국에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의 한국교회가 천년은 수고해야 얻을 수 있는 신자(기독교세력)를 백년에 얻고, 황금송아지떼를 앞세운 맘몬(사탄), 그리고 동이 오랑케 고유의 무속과 주술을 앞세운 반(反) 기독교 세력 앞에서 철저하게 변질된 로마를 닮았다고 본다. 심지어 금성철벽 보다 완전해 보였던 '칼빈의 예정론'이 '단군 조선의 운명론' 앞에서 두 손을 들었으니 말이다.

결국 한국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와 데오도시우스 1세 시대의 꼴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수많은 잡신과 이방신들이 기독교가 국교가 되니까 그들도 기독교 간판 내걸고 행세했듯이 교회 간판 속으로 피신한 주술을 앞세운 무당신앙, 기복신앙, 운명론 신앙, 돈, 명예, 세력 등으로 무장한 사탄의 세력 앞에 포위된 한국교회는 항복해야 할 시간만 남겨두고 있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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