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평생을 함께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던
 성산 장기려 선생(왼쪽 두번째)과 함석헌 선생(왼쪽 세번째).


함석헌은 모든 체제, 모든 논리에 일단 ‘아니’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퀘션(question)의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자신의 믿음, 자신의 것일 수 없는 한 그 어떤 것도, 누구의 것도 수용을 거부했다.

함석헌이 절대의 것으로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한국 기독교의 대교리인 소위 ‘예수의 대속론(代贖論)’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원인자, 우주의 뜻, 역사 배후의 절대의지를 철석같이 믿는 이였지만 누구 '만'(only)의 종교, 신앙은 예외 없이 '협잡'이라 일갈했다(전집3, p.144).

1952년 내어놓은 함석헌의 시 ‘흰 손’과 다음해 1953년에 내어놓은 ‘대선언’은 함석헌의 종교를 농축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1952년의 그의 시 ‘흰 손’에서 한국 기독교가 신주처럼 떠받드는 소위 예수의 대속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대속은 없다(?)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청장(淸帳)을 내 안다더냐?”


“힘은 아니 들이고 빌어 삶,
생각은 아니하고 `더라’만 외는 빎,
이름을 빌 망정
삶을 어찌 빌 수 있느냐?


“예수는 예수요
너는 너요,
멎음 없는 역사의 흐름 흐르는 언덕
저쪽엔 그가 서고, 이쪽엔 네가 서고.”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긴 기록을,
영혼의 미간에 박힌 죄악의 허물을,
대신을 누가 대신한단 말이냐?
맘은 있다손 어떻게 하느냐?”


“너는 너 아니냐?
너만이 너 아니냐?
나는 나 아니냐?
나는 나만 아니냐?”


“예수는 예수요 네가 넌 이상은,
상대의 바다에 서로 떠 바라는 한은,
그는 우뚝 서시는 섬산 바위요,
너는 까불리우는 조각배요?”

“멀어도
배는 배 바위는 바위,
가까워도
바위는 바위 배는 배”

“하늘 땅 부르짖어도
그 배 그 바위 그대로 아니냐?
발을 동동 굴러도
그 바위 그 배 그대로 아니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 되기 위해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너는 그것을 했느냐?
이 스스로 정통이라 자랑하는 자야!
정통은 빈 통이다
이 표지 든 흰 손아!”

………

“여봐라!”
“예- 이-”
“너,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 놈들을 끌어내어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함석헌의 시 ‘흰 손’ 발췌


무교회 교우들에게 이같은 함석헌의 ‘흰 손’은 실로 기절초풍(氣絶礁風) 할 노릇이었다. 함석헌이 누군가? 그가 동경고사(東京高師) 재학 중 4년에 걸쳐, “36년 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감사해 마지않던 그 우찌무라의 심줄 아니었나?

동경고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오산고보에 머물던 10년 분골쇄신하며 무교회를 부르짖어온 새종교(?)의 북수(鼓手) 아니었나? 적어도 무교회 사람들에게 그는 하늘이 고르고 또 골라 보낸 예언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랬던 그가 변한 것이다. 변해도 너무 변한 것이다. 예수가 주님이 아니라니. 십자가의 대속이 아니라니. 그것은 무교회 교인들로선 실로 미칠 일이었다. 동시에 함석헌의 대속론(代贖論)이 떴다.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게 한 최우선의 이유이기도 했다.


함석헌의 대속관(代贖觀)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우찌무라·필자 주)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예배의 형식, 예배 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헌금·필자 주)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찌무라식을 본땄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 조차 고쳤습니다.

덮어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 스스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하여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힘썼습니다.… 기독교에 말라붙은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노라니 의문의 차차 생겼습니다. 전에는 문제 없는 것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그 하나는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인간에게 대속(代贖)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복음주의 신앙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전에 선생이 해주었던 말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거기 에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아서 입니다. 깊은 체험 보다는 감정의 도취인 것 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을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 났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 서로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 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서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파고드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색은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해석 못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행동하는 도덕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두 미신에 떨어지고 맙니다.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그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게는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 오히려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닌란 체험에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요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이 없이 대신해 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이 못 일어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에 감격하는 사람은 대개는 인격의 개변, 곧 죄의 소멸은 없이 그저 기분으로만 감사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 날의 진 빚을 물러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 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서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끝이 없는 문제지만,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내 딴으로 풀어버렸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딴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내 육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 해서 감사히 여기는 것은 하나의 자기 중심적인 감정뿐이요, 도덕적으로는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죄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이러한 판단을 내려버렸습니다”(1970. 4. 씨알의소리, p.54∼56).


고난의 현장에서 얻은 영안(靈眼)


그리고 함석헌은 “이것이 우찌무라의 신앙과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이같은 함석헌의 그리스도사상, 속죄신앙이 그의 정론(正論)으로 대중 앞에 발표된 것은 1970년 그가 창간하는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였지만 그의 사상의 싹트기는 1940년대 초 일본제정 치하에서의, 해방 직후 1945∼46년대 소련군정 하에서의 수없이 계속되는 감옥생활 중에서였고, 6.25 한국전쟁은 함석헌에게 있어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들을 역사의 눈으로 읽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달리 함석헌에게는 죽고 살기를 함께 하기를 바라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 중의 대다수는 무교회주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무교회의 교우들에게 함석헌의 바로 그 변고가 생긴 것이다.

“함 선생님이 변했다!”, “함 선생이 이상해졌어”, “함 선생이 이상한 소리를 한대….”

모두가 하나같이 함석헌이 옛날 함석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변했다. 말로만 전해지던 소리가 이제는 말로만이 아니었다. 잡지에, 신문에, 국내에서는 물론 바야흐로 무교회의 종주국인 일본에서까지 `함석헌의 변질’이 무교회를 넘어 기성교권, 교리에 목을 매고 있는 이들의 입과 글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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