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 추모의 밤에 함석헌 선생.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예수는 예수요
너는 너요,
멎음 없는 역사의 흐름 흐르는 언덕
저쪽엔 그가 서고 이쪽엔 네가 서고”

“심장의 육비에 새긴 기록을,
영혼의 미간에 박힌 죄악의 허물을,
대신을 누가 대신한단 말이냐?”


……


“너는 너 아니냐?
너만이 너 아니냐?
나는 나 아니냐?
나는 나만 아니냐?”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그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게는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 오히려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 특히 무교회 인사들은 그를 이상(異常)이라 하고, 변고라 하고, 심지어는 ‘정신이 나갔다’라고까지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교회 신앙의 핵심이 ‘예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이었으니 말이다.

“십자가의 그 ‘대속’이라는 말이 인격이 없는 자들에게는 고맙게 들릴 것이나….”

이 말은 한일(韓日)의 모든 무교회 식구(무교회 교우들은 스스로를 `식구’들이라는 말로 일컫는다. 필자 주)들을 예외 없이 인격 없는 자들로 내쳐버린 것으로 들을 수밖에 없게 했다.

함석헌에 대한 배척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교회가 조금 앞장섰을 뿐 한국기독교 특히, 보수 계열의 거물(?)들이 대거 합동했다. 평소에 순수한 신앙으로(?) 함께 했던 이들의 함석헌에 대한 비토는 결코 간접적일 수만은 없었다.


함석헌의 대속론에 속앓이 하는 사람들

1940년 정릉 김교신의 사저에서 함석헌을 처음 만나 1989년 함석헌이 그의 생을 다할 때까지, 사제의 끈을 놓지 않고 일로 매진해 온 천하인의(天下仁醫) 장기려는 함석헌의 입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고백을 듣기 위해 속을 태우던 중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시다’라는 증거를 듣고는 그냥 눈물을 쏟았고, 반대로 장 목사는 함석헌의 그의 ‘말씀모임’에서의 성서 해석을 `독초를 풀어 마시게 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함석헌이 “`이 땅에 자신을 바쳐 남을 살리는 두 사람의 의사가 있다. 장기려와 최태사다”라 했던 그 두 의사 중의 한 사람 최태사는 함석헌이 회심하여 옛날의 함석으로 돌아오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성자라 불릴만큼 호남 지역의 큰 인격으로 대접을 받던 박석현 같은 이 역시 함석헌 때문에 가슴앓이를 깊이 해야 했다. 무교회 신앙인으로서는 함석헌의 6·25 이후 1952, 53년을 지나면서 공사석을 마다않고, `천하자주의 인격에 대속은 무슨 대속이냐? 그거 다 종놈의 신앙이다’ 하는 발언이 박석현의 귀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함석헌의 대속 부인을 전해 듣고, 또는 직접 듣고 확인한 박석현은 함석헌의 회심(회개?)을 그의 기도 제목으로 삼았다. 박석현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함석헌이 속죄 신앙, 대속 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정말 간절히 오죽한 기도를 드렸다. 함석헌의 입에서
‘'속죄 신앙을 믿는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그러나 박석현의 기도는 기도로 끝나고 말았다.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의 대(代)를 이은 일본 무교회의 지도자로 고교삼랑(高橋三郞)이 있다. 그는 60년대 초 함석헌이 방일한 기회에 함석헌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속죄신앙에 대해 물었다. 함석으로부터 ‘믿는다’는 답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함석헌은 이제 무교회 주의자가 아니었다. 함석헌의 답은 머뭇거리지 조차 않았다. ‘속죄는 자기가 해야지 남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같은 함석헌의 대속관을 확인한 다까하시사부로(高橋三郞)는 뒤늦게 그가 주간으로서 발행하고 있는 신앙잡지 〈십자가의 말씀〉에 `자기 발견의 길’이라는 주제의 글을 싣는데(1991. 10월호), 이 글은 글을 싣기 두 달 전 1991년 8월 하찌오오지시의 대학 세미나 하우스에서 개최된 일본의 청년 학생들을 위한 성경 모임에서 한 강연 내용을 그대로 게재한 것이었다.

그의 강연은 ‘함석헌 선생의 생애를 다듬어 봄으로써 그 인생 탐구의 존재 양상에서 배워보기로 하겠다’는 전제하에 시작된 것이었지만 강연 전체의 내용은 ‘변절자 함석헌’의 성토였다.

“…그리고 당시 우찌무라 문하에 있던 여섯 사람의 유학생들은 1927년부터 〈성서조선〉이라고 이름붙인 동인잡지의 발행을 시작하여 이것이 한국 무교회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초 이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함석헌은 후에 이 무리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스승 우찌무라로부터 `죄의 용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십자가의 속량은 거짓에 불과하다’라고 극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석헌을 반(反) 속죄 신앙자로 정죄한 다까하시사부로는 함석헌에 대한 개인적인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쨌든 함석헌의 변화에 주변에서는 야단법석이 이어졌지만 함석헌은 여전히 달라져가야 했다. 달라지고, 또 달라지고….

그런가 했더니 기어이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불집을 헤쳐버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는 물론 한국 종교사에 이종(異種)으로 온 사람이었다. 전혀 새롭게 열려져 오는, 전혀 새롭게 열어가야 하는 새 역사의 씨알로 특선된 인격이었다. 그 인격의 변증(辨證)이 곧 대속의 거부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 대속사관(代贖論史觀)


함석헌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을 통해서 재현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예수와 다를 수가 없었다. 함석헌이 “자신이 믿는 것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요(한국 기독교, 세계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 필자 주), 예수 안에 있던(있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던 그 순간,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온 자로 자신을 내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내 안에도 있다.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내가 하나 되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 같은 고백의 내용은 세상 말로 하면 철저한 실패자의 삶을 의미한다.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의 뜻의 성취만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삼아야 하는 비극적 삶을 ‘아-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일편 함석헌에게는 말로는 못 다할 평화와 자유로 왔다.

이제는 그에게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국 기독교가 절대의 진리인 양 신봉하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구원’과는 동형이질(同形異質)의 이 함석헌의 대속사. 어쩌면 함석헌이 이 한 진리(?)를 찾기 위해 그 서럽디 서러운 역사를 그렇듯 끈질기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의 대속 사관을 점점이 헤쳐보면 그가 왜 교수도, 목사·신부도, 정치인도, 법관도, 장차관도, 군관도 될 수 없었는지를 인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런 이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붙일 필요가 없는 그런 이들을 민중(씨알)이라 부르면서, 그 민중, 그 씨알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때, 되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 이름한 것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함석헌, 민중전용(民衆專用)의 대로를 열다

1956년 그런 함석헌에게 몇 가지 고마운(?) 일이 생긴 해다. 1956년 〈사상계(思想界)〉 1월호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발표된 것, 5월에는 연초부터 짓기 시작한 함석헌의 작은 둥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70번지)가 이루어진 일, 그리고 1953년 남북정전협정으로 같은 해 가을, 피난지 김해에서 상경한 이후 이제까지 대성빌딩, 에비슨관 등에서 오전에는 유영모가, 오후에는 함석헌 자신이 번갈아가며 계속해 온 말씀 모임에 연말을 기해 유영모가 그만 두고 함석헌을 떠난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1957년 비로소 함석헌의 이름이 붙은(?) ‘`말씀 모임’이 시작된다.

함석헌이 역시 최태사의 도움으로 이대 정문 옆의 한 집을 얻어 살아가고 있던 1955년 초겨울 어느 날, 때 아닌 한 귀빈들의 방문을 받았다.

사상계사 사장 장준하와 편집 책임자인 안병욱의 방문이었다. 월간 〈사상계〉에 글 하나 써달라는 말하자면 원고 청탁이었다. 아직 함석헌이 저명 인사류에 속하지 않는 때였지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만큼은 알려져 있었다.

장준하는 제목의 제시도 없이 “무슨 말씀이든지 좋으니 쓰고 싶은 말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장준하, 안병욱의 원고 청탁에 혹하지는 않았지만 맘속으론 고마웠다.

건강한 지식인들은 물론 광범위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상계〉가 자신의 글을 조건 없이 싣겠다니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함석헌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정말 진지한 간청에, 새해 1956년 1월호에 실을 수 있도록 글 쓸 것을 약속했다.

그것이 예상치도 못했던 독자들의 격찬과 아우성으로 낙양의 지가를 오르게 했다는 저 유명한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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