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축하모임에서 강연하는 함석헌 선생.


고은, 신경림 등 당대 시인들이 예찬… “꾸밀수록 어줍잖고,
칠할 수록 탁해지고 추해지는, 그래서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 밖에



1961년 저 유명한 사상계(思想界) 지상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하면서 맨 사람 함석헌은 기이(奇異)와 신비(神秘)를 지닌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시인인 신경림은 그를 일러 ‘영원한 시인’, ‘문필인’이라 했고, 언론인 송건호는 그를 일러 ‘영원한 언론인’이라 했지만 그의 말, 그의 글이 이승만의 독재치하, 박정희, 전두환의 군정치하에서 국가권력과는 또다른 힘으로 맞대응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이었을까?

문벌도, 학벌도, 조직도, 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함석헌이 1989년 2월 4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33년 동안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듯 꺼질줄 모르는 예언자의 함성을 내지르게 한 것일까? 그것은 함석헌 만이 입은 맨 사람(씨알), 맨 글(口語體)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함석헌은 이 점에서 하늘의 은혜를 지극히 입은 사람이었다.

고은(高銀), 신경림(申慶林) 같은 당대의 시인들이 ‘메시지의 전달자’로서 함석헌을 증언한다. 고은은 ‘맨 사람’으로서의 함석헌을, 신경림은 함석헌의 ‘맨 글’을 다음과 같이 예찬(?) 한다.


# ‘맨 사람’


먼저 고은의 하늘이 낸 그대로의 사람, 곧 맨 사람 함석헌의 예찬을 보자.

“천하절경! 함석헌 선생.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 보면 참 좋아라. 그는 그 이상의 한 아름다움이다. 어언 90평생의 삶을 역사의 비바람속에서 그렇게 걸어오신 그의 모습을 어느 놈의 깔끝이 겨눌 것인가. 어느 놈의 사악한 중상이 끼어들 것인가.

信天 咸錫憲 선생은 우리 현대사가 이룩한 고행 속의 노래다. 바람이다. 흐르는 물이다. 그는 역사 속에 있으면서 늘 본질적이다. 사회의 가장 긴박한 상황속에 있으면서 자연이다. 그가 흔히 말하는 장자의 〈지극한 이〉, …그가 곧 그런…이다. 일생을 다해서, 온 몸, 온 마음으로 우리 민족에게 바른 길을 개척해온 그는 이미 어린시절의 3·1만세운동으로부터 그의 운명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래 수많은 투옥과 민족의 교육에 이어 그의 항구적인 비폭력의지로써 그는 우리 역사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자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역사와 현실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역사관은 동시에 우주의 본질론이다. 노자의 ‘무위’가 곧 오늘의 당명문제의 바탕인 것이다. 그에게서는 아무리 굴욕 외교반대와 유신체제 반대가 외쳐져도 거기에는 언제나 ‘태초’가 깃들인다.

그의 말 한마디는 이윽고 하루내내 이어지는, 쉴 줄 모르는 강물의 담론이 된다. 그 하얀 무명 두루마리, 그의 하얀 수염 하얀 머리털들은 길다. 그의 哲理야말로 길고 길다. 실로 우리 민족의 오늘은 온갖 고초 가운데서도 이런 거룩한 명품 함석헌을 세운 것이다.

언젠가 함석헌 선생이 안병무 교수와 함께 북유럽에 다니러 갔을때 그곳의 한 길목에서 지나가던 서전 아낙네가 함 선생을 보고, ‘여보시오,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나 당신의 눈이 참 좋소이다’ 하고 탄복했다는 그 눈의 신묘한 눈빛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오래오래 어느 이른 아침의 추운 깨달음을 베풀어주고 있다. 함석헌 선생의 영화는 진정코 솔로몬의 영화 보다 훨씬 드높다(現代史의 證言 5권 머릿말, 도서출판 福祉 1986).”

함석헌이 누군가? 거기엔 많은 말, 복잡하고 어려운 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수의 설명에 신학자들, 종교적 거인(?)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예수 알기를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지 않든가?

그러나 하늘이 어떤 인격에게 어떤 역사적인 ‘말씀’을 위임할 때 요구하는 조건이 있다. 곧 ‘맨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로 함석헌은 그 때, 그 ‘말씀’의 메신저(messenger)로 절묘하게 준비된 사람이었다.

‘맨 사람’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민중사상(民衆史上)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70세가 되던 1970년 월간 민중지(民衆誌)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면서 부터이지만 이미 그는 너덧살 되던 때부터 오직 영원(永遠·브라만)만을 향해 내달려야 하는 이(自我·아트만)로 운명지워져 있었다.

역사의 메세지를 전달한 메신저에게 요구된 유일 자격이 ‘맨 사람’이라 했는데, 맨 사람이란 일체의 구조, 체제, 틀로부터 쫓겨났거나 거부한 사람을 말한다. 그것들은 인격이 영원으로, 전체로 가는 길에 어떤 경우에도 반동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늘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으면서도, 그 세상을 가리켜 ‘이것은 내 나라가 아니다’ 한 것은 그래서였다. 역사는 이제까지와는 전혀다른 인격적인 도구가 필요했다. 오직 받고난 그대로, 태초의 그대로, 오직 그것만을 전부로 아는 그 같은 인격적인 도구가 필요했다.

금관을 씌워도 맞지 않고, 천하의 금의(錦衣)도 가당찮은. 꾸밀수록 어줍잖고, 칠(彩色) 할 수록 탁해지고 추해지는, 그래서 본래(本來)의 모습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격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맨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거나 함석헌은 천하일품의 맨 사람이었다. 맨 사람! 병든 세계사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순격(純格)이었다.



# ‘맨 글’(口語體)


신경림은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넘어〉를 읽고 그 미럿글을 인용, 다음과 같은 시평을 하고 있다.

“그는 다시 이 글에서 ‘사과할 터이면 하고, 말터이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바칠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로써 그의 시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된다. 한 마디로 그의 시는 메시지 전달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머리말은 그가 시에서 가장 능률적인 메세지 전달의 기능을 찾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現代史의 證言 5권, 평화주의자 함석헌 p.39. 도서출판 福祉 1986).”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의 시가 지닌 힘은 이미지나 메타포니 형상이니 하는 시적 잔재주를 철저하게 거부 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기 보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시적 잔재주를 몰랐고, 그것이 오히려 그의 시를 읽는 이에게 힘 있게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또는 그는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시적 잔 재주에 신경을 쓸 겨룰이 없었는지도 모른다(같은 책 p.41).”

또 하나, 함석헌의 천부의 은사(天賦恩賜)가 그의 구어체(口語體)의 글이었다. 그는 고금동서를 휘잡는 거학(巨學)이었지만 도무지 그의 글엔 글 냄새, 먹물 냄새가 없었다. 함석헌의 글에서 전혀 먹물 냄새가 피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사의 절대담지자(絶對擔持者)로서의 민중을 계시받은 함석헌에겐 민중과 더불어 거칠 것이 없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민중의 용어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터였다.

그는 세계의 철학, 종교, 사상 등의 심오한 내용들, 용어들을 민초들의 말, 민중들의 말로 희한하다하리 만큼 풀어 밝혔다. 시인 신경림이 그의 ‘글의 힘이 결국은 구어체에서 온 것이었다’ 하면서 함석헌의 구어체를 다음과 같이 예찬한다.

“함 선생이 주는 글의 감동의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내용에 있다. 스스로 민초, 풀을 자처하면서 현실의 온갖 거짓과 그듯됨을 깨어 부수려는 그 치열한 역사 의식과 올바른 현실인식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에 걸맞는 형식, 아니 그 형식이라는 것이 철저히 파괴된, 일체의 격식이나 체면을 벗어던진 그 특이한 문장이 아니었다면 그의 글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함 선생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글이 갖는 마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의 가장 큰 미덕은 구어체의 철저한 사용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의 산문의 특징은 대체로 문어체를 사용하지 않고, 구어체를 사용하는데 있다고 하나, 어느 정도 문어체를 써야만 권위와 품위와 점잖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함 선생의 글은 이런데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논전 당시 상대방으로부터 쌍스럽고 교양이 부족하다는 뜻의 핀잔을 받는 꼬투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그의 글이 갖는 가장 큰 힘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같은 책 p.37).”

1950년대 후반 이후 함석헌으로 독보적인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것은 1901년 그가 세상에 온 이후 어떤 체제, 구조, 주의의 예속을 죽기로 거부하고 살아온 ‘맨 사람’으로서의 생애였고, 그 ‘맨 사람의 삶’을 그려낸 ‘맨 사람의 말과 글’이었다. 때문에 그의 맨 말, 맨 글은 누구도 따라서 하거나 쓸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맨 사람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한 번 말하지만 이 점에서 함석헌은 그의 일생이 고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해도 더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가 맨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한 그의 글, 그의 말은 한이 없을 것이었다.


# 그의 ‘주(主)’, ‘민(民)’


그의 글, 그의 말에는 도대체 문헌이나 인용구가 없다. 시종 주셔서 한 말, 주셔서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1956년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쓰기까지 온 몸으로 살아야 했던 고난의 60년, 그 이후 30여 년 세월을 더하는 90여 년의 장구한 해 들, 날들을 살모사(殺母蛇)처럼 감겨드는 온갖 구조악을 뜯어내기에 넘어지며, 뒹굴며, 다시 일어서면서 살아낸, 그 지존자(至尊者)로부터의 절대 순종의 삶을 통해 받은 글, 받은 말들은 그의 육의 죽고 살고와는 관계없이, ‘그의 주(主)인 민(民)’(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p.83, 1964 삼중망 참조)이 역사의 주체로 분명히 설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함석헌의 독특성이라 할까, 위대성이라 할까는 재론할 필요가 없이 그가 한국사에 나타난 ‘민중의 사람’이었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 신학자 서남동은 ‘민중(씨알)은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민중, 민중론의 첫 사람으로 함석헌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1959년, 60년대로 들어오기전에 함석헌 선생님이 3·1절에 기념강연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민중에 관해서 굉장히 역설을 하고(거기에 대한 민중론은 제가 지금 그대로 따라가는 민중론입니다만), 그리고 이후 10년 동안 민중이 선생님의 사상에 생활에 주도이념이었고, 70년대 들어 잡지를 시작하면서 씨알이라는 말로 그것(민중·필자 주)을 바꾸고, 승화하고, 심화하셨는데, 그 이후 1975년쯤 되어서야…

‘민중’을 주제로 한 〈창비〉(창작과비평)에 지성인들이 민중이 실질적인 모든 문화활동이나 또는 경제평론이나 정치논평이나 하는 것이 주제가 되고, 부각된 것은 75년부터라고 해서 큰 잘못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 해부터 신학자들도 ‘민중’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민중신학’을 시작했습니다.

사상적으로 말하면 한 15년 이전에 함 선생님은 민중을 주제로 하고, ‘민중을 섬기는 것’으로 삶의 본을 작정하셨고, 승화하셨습니다” 했다(한국민중론 p.553, 한국신학연구소편 19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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