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안쓰러워서 발을 동동 구르시는 분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바리새인 집 식탁에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입심 좋은 율법사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수의 말씀에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사보다 더 고단수이셨다. 누가복음 11장 현장으로 가보자.

“너희 바리새인들아, 뭐 손 씻지 않아서 불결하다.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잖아.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은 만들지 않으셨을까!”

화 있을진저! 또 화 있을진저! 예수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다시 한 번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사태는 겉잡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험한 말씀을 하시면 ‘우리까지’ 모욕하심이 됩니다(율법사의 항변). 예수도 물러설 수 없었고, 율법 선생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우리까지’냐면서 인내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다시 예수는 크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자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으로도 이 짐에 손을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격렬함을 지나 자칫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살의를 느끼는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예수께서 작심하시고 쏘아붙인 후 그곳에서 나오실 때 제사장과 선지자 무리들의 모습을 보라(눅 11:53~54).

예수의 말꼬리를 잡아 기세를 꺾고, 또 죽일 명분을 찾는 미친개 같은 집요함을 보라. 바로 이 현장의 예수 앞에서 혼쭐이 나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이 누군가? 오늘의 의미에서는 큰소리 치며 잘난 체 하고 있는 위선자 그룹인 소위 잘나가는 목회자들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교회들 안에서 자기 교회 외에는 다른 걱정이 없는 목회자들의 죄가 예수께 도전하는 율법사들의 죄와 같다. 그리고 율법사들을 엄히 꾸짖는 예수의 분노는 오늘의 한국교회 무능한 목회자들에게도 해당한다.

왜, 무능인가? 왜, 주 예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인가? 예수의 때에 예수를 괴롭히는 율법사나 제사장 계급들처럼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울타리를 치고 버티면서 예수에게서까지 허물을 찾으려고 눈이 시뻘개진 목회자들. 저들이 인질처럼 붙잡고 있는 신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저들 착한 신자들이 제대로 신자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저들 신자와 예수와의 관계에서 신자들을 예수께 내주지 않는 목회자들의 독점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교회당 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신자들은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일 수 있다. 우리, 지금 어떻게 하면 우리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까? 예수의 분노를 잠재우고, 주님께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위로를 느끼게 할 수는 없을까?

끝으로, 차라리 누가복음 11장의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처럼 분노하고 일어나서 예수님과 맞장을 떴으면 좋겠다. 정직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양심의 거짓부분을 몰아낼 수 있어야 하겠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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