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오른쪽)과 장준하.


〈재야의 빛 장준하〉를 쓴 전기작가 박경수는 함석헌을 일러 ‘그 생애에 만난 또 하나의 귀인’이라 했지만 장준하 역시 함석헌이 만난 ‘또 하나의’(?) 귀인이었다. 함석헌을 만나기 전 장준하는 이미 있었고, 그의 주위에 있는 이들에겐 구국과 민주화의 화신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함석헌 역시 그랬다. 김교신이 일찍 지상의 삶을 마감하므로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벌써 한국무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역사하고 있는 터였고,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영모와 함께 김명선 세브란스 의대학장의 지원으로 대성빌딩, 에비슨관 등에서 수년동안 공개강좌를 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함석헌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의 젊은 청년학도들, 특히 젊은 진보적 사상의 크리스천들에게 깊은 감화,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민중 속에 새 혼을 불어넣는 전국 차원의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물론 하루하루의 삶을 종교적으로 체험해가는 함석헌에겐 저차원, 고차원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정말 함석헌은 순간순간을 예배로 살았고, 그래서 삶이란 그에겐 곧 제사일 수밖에 없었다. 넘어졌으면 넘어진 자로서 넘어진 자의 삶을, 일어났으면 다시 일어난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했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의미에서만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 살림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그는 옥에 갇혀있는 동안 온 신경을 여러 종교의 경전읽기에 집중했다. 누가 뭐래도 함석헌을 만든 것, 함석헌이 되게 한 것은 함석헌 자신이 살아내는 그 자신의 삶이었다.

함석헌의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헌신! 하늘은 그런 함석헌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늘은 함석헌을 통해 세계사를 한 차원 높이기로 했고, 그래서 보낸 것이 장준하였다. 마치 성서의 주(主)가 성서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예수와 세례 요한을 준비했던 것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신약성서가 예수와 요한의 관계를 요한이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함석헌과 장준하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위한 선후, 혹은 상하의 관계가 아닌, 이제까지 서로가 상상치도 못했던 새 역사, 새 세계의 구현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로의 승화를 위한 실로 ‘섭리(攝理)의 상봉’이었다 할 것이다.

어쨌던 그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함석헌이 장준하를 만나고 장준하가 함석헌을 만난 것 말이다. 필자는 한국사에서의 자랑스런, 감격스런 인물의 만남에 이 보다 더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더 크고, 높고, 깊고, 넓은 관계를 말이다.

함석헌과 장준하가 죽어도 지키기로 결심하는 민주주의와 자유, 자주, 그리고 통일과 평화의 구현을 위한 투쟁에의 일체임을 서원하는 것이 1956년 1월인데, 여기서 우리는 1952년 9월, 장준하가 창간하는 〈사상계〉(당시는 ‘사상’이라 했음)의 1955년 12월까지의 프로세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함석헌, 장준하가 함께하는 반독재, 민주수호, 자유·자주·평화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기 전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장준하, 세상에 오다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는 1918, 1919년 3·1운동의 한해전 평북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義州郡 古城面 燃霞洞)에서 아버지 장석인(張錫仁)과 어머니 김경문(金京文)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3년 15세때 대관(大館)보통학교 졸업,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진학했지만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선천 신성중하가교로 전학, 1938년 5월 동교를 졸업하고, 신안소학교 교사를 거쳐 일본 유학의 장도에 오른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신성시절 학우 중 동경의 동양대학 재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던 김익준(7~8대 국회의원, 후에 육상연맹이사장)의 전적인 지원과 권유로 도일, 동양대학이 아닌 동경신학교(후에 日本神學敎)에 진학하게 되는데, 장준하는 여기 일본 신학교에서 후에 한국 기독교계의 인물들로 크게 존경받게 되는 학우들을 만나게 된다.

지동식(池東植), 전택부(全澤鳧), 전경연(全景淵), 김관석(金觀錫), 박봉랑(朴鳳琅), 김철손(金喆孫), 백이언(白理彦), 문익환(文翌煥), 문동환(文東煥)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었다.

평생 장준하의 동지로 생사를 함께 했고, 후에 고려대학의 총장이 되는 사학자 김준엽(金俊燁)은 이때 게이오대(慶應大)에 재학중이었는데 함께 일군을 탈출, 광복군의 동지가 된다. 광복군에 편입된 장준하는 미구에 전개될 일군 축출을 위해 조직된 특수부태(OSS)의 요원이 되는가 하면 광복군 대위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가 되어 해방과 더불어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한의 귀국을 이룬다.


장준하, 해방된 조국땅을 밟다


귀국 초기부터 경교장의 김구를 보좌하는 장준하는 김구의 보좌진들로부터 찬탄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 장준하의 역할 때문이었다. 장준하의 역할이란, 김구를 찾는 귀빈들을 안내하는 일, 국내외 정세를 면밀히 주시, 관찰하여 김구에게 보고하는 일은 물론, 특히 그가 독차지 하고 있는 소위 김구의 스피커 역할이었다.

김구의 귀국성명은 물론 귀국 이후의 경교장으로부터 발표되는 경고문, 담화문, 성명서, 연설문 하나하나가 예외없이 장준하의 초고(初稿)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이같은 원고들을 써낼 때마다 장준하는 자신이 김구의 비서라는 신분을 깡그리 잊고 오히려 김구를 통한 자주독립 조국의 꿈을 거대하게 그려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촌음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틈이 나기만 하면 성경과 조선역사, 세계역사를 학자같이 읽었다.

김구는 장준하를 사랑했다. 김구의 장준하의 칭호가 ‘장목사’였다. 그의 귀국을 기뻐하는 국내외의 한다하는 인사들이 김구의 대환영회를 열었는데(임시정부 한국환영위원회) 환영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한 부부가 값진 한복 한 벌과 기념금반지 하나를 선물로 드렸다. 그 한복은 헌증자가 손수 지었던 것으로 김구는 그가 반역의 흉탄에 그 명을 달리하기까지 아주 즐겨입었는데, 그 기념금반지는 선물로 받은 한 달쯤 후 경교장에 단독으로 초청을 받은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金凞淑)에게 전해진다.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자진 입대하여 일군으로 훈련을 마치면 틀림없이 중국 북부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어느 부대로 배치될 것이고, 그러면 일군부대를 탈출해 중경(重慶) 임시정부 아니면 우리 독립군을 찾아갈 것임을 이제 막 장준하의 신부가 된 김희숙에게 알리면서 이같은 계획이 계획대로 실현되면 ‘돌베게’라는 암호로 알리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진 것이 벌써 두 해가 지났고, 김구의 비서로 환국한지 한 달여가 지났는데도 귀국의 사실만 어렵게 알렸을 뿐 아직도 희숙을 만나보지 못한 채 지내오고 있었다.

장준하는 어느날 조용히 김구를 만나 2~3일 정도의 휴가를 요청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김구로부터 의외의 답변을 들은 것이다. 아내 김희숙을 한 번 보고싶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도 놀랐고, 소식을 전해들은 김희숙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지 몸 둘 바 조차 몰랐다.

장준하에 대한 김구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김희숙은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듯 불려와 김구 앞에 섰다. 김구는 아주 낮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자네는 참 귀한 신랑을 두었어…. 잘 살아야지….”

그러면서 김구는 자기가 끼고 있던 그 귀국환영회로부터 받은 금반지를 빼어내 김희숙의 손을 이끌어 그의 손가락에 꼬옥 끼워주었다. 김희숙은 온 천지가 깜깜했다. 그저 멍…했다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후엔 온 천지가 환해지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내 것 같았다. 정신이 제 자리에 들었을 즈음 옆을 돌아보니 그 잘난 얼굴의 신랑이 쳐다보며 방긋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정국은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고, 김구 역시 어려워지고 있었다. 경교장의 분위기 또한 장준하가 기대하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경교장을 떠난 이후 철기 이범석의 족청(族靑)의 교무처장, 백낙준의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선임연구위원 등의 자리를 거쳐보기도 했지만 그의 가슴의 허전함은 달래지지 않았다.


전쟁중에 〈思想〉을 생각하는 사람


도대체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신적인 방황(?)을 계속하고 있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장준하는 피난수도 부산에 피난하게 된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비상시를 헤쳐가는 사람이라는 데서 하는 말이다.

언젠가 함석헌은 ‘장준하 있는 곳에 일이 있다’ 했다. 부산이란 장준하에겐 맨땅이었다. 맨땅에 맨주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전쟁 중에서 ‘사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사상’을 생각하는 사람! 그것이 장준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월간 〈思想〉을 창간했다. 그 잡지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대단했다. 피난수도 부산에 모여든 지식인들에게 보여진 〈思想〉은 그야말로 전시 중의 시민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요, 청량제로 2, 3, 4호를 내면서 사업의 측면에서도 굳건한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반면의 문제가 있었다. 〈思想〉의 그 내용 때문에 〈思想〉은 광고도, 광고사원도 없이 팔려나가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그 내용 때문에 잡지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정부권력으로부터의 압력과 탄압이 가해지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당시 〈思想〉의 영업부를 담당하며 뛰고 있는 사원이 서영훈(후에 흥사단 이사장, 적십자사 총재, 민주당 당대표 역임)이었다. 서영훈이 〈思想〉 3호의 원고를 얻기 위해 이화여대 교수 고형곤(高亨坤·전 국무총리 고건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장준하의 인간됨을 숙지하고 있던 고형곤은 원고는 물론 음양으로 잡지의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 같은 대학의 한 단과대학 학장을 소개해주었다.

이 여학장이 다른 사람 아닌, 후에 이승만의 분신이 되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라는 것을 서영훈이 알 턱이 없었고, 그를 소개한 고형곤 역시 〈思想〉의 정신적 지원자가 박마리아의 남편 이기붕과 이승만 휘하의 라이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영훈은 그저 좋은 후원자를 얻었다는 생각만으로 박마리아가 묻는 대로, 또 묻지 않는 것까지 마치 〈思想〉의 운영보고라 하리만큼 자세한 보고(?)를 했다. 그런데 서영훈의 보고에 박마리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바로 그 ‘백난준의 정신적 후원’ 운운이었다.

이후 〈思想〉은 적어도 사업체로서의 존재만은 접어야 했다. 백난준이 후원자로서의 손을 접는다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해서 장준하의 〈思想〉은 4호의 출판으로 그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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