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사도들을 뛰어넘는 영적 총명을 가진 초대교회 지도자였다. 그는 ‘종교시대’의 종결을 예고하는 이사야(사 66:1~)를 배웠고, 종교지상시대의 마성을 향해 결정적 타격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요 2:19)를 배운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모세의 율법을 폐기하라’ 했다는 음모(행 6:14)와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이 아니라는 이사야의 가르침을 웅변하다가 잡혔다(행 7:48~). 스데반은 정통신앙, 예수의 가르침에 바르게 선 그의 믿음으로 인해 사울이라 하는 서투른 율법학자의 지휘를 받는 유대집단에게 붙잡혀 죽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고, 의연하고 당당했다. 그는 돌더미 속에서 두개골이 으깨져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인 자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까지 했다(행 7:59~60). 스데반은 죽고, 사울(후에 바울이 된 자)은 피를 본 늑대처럼 예수 믿는 자들을 그의 손에 잡히는대로 감옥으로 보내고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다마스커스(다메섹)에서 그의 광란은 멈춰야 했다. 그의 천방지축 날뛰던 발목을 부활하신 예수가 낚아챘다. 그는 타고 달리던 말에서 굴러떨어졋다.

그의 광기는 스데반의 성령충만한 자신감 앞에서 얼어붙은 그의 양심의 반란이었고, 그가 달리던 말에서 낙마하게 된 것은 스데반의 장엄한 순교현장을 지켜보다가 보좌에 앉아 있을 수만 없었던 예수(행 7:55~56)의 발걸음 앞에서의 절망이었다.

오늘의 기독교는 율법의 횡포 앞에서 죽어주는 스데반을 찾는다. 도무지 모세의 칼을 휘두르는 위장된 교회의 위선을 고발할 힘이 없다. 이 세상의 방식과 야합하여 참되게 살고자 하는 신자들을 목졸라 죽여가는 교회라는 이름의 억압으로부터 예수가 아꼈던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신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로부터 예수를 구출하자는 역설 같은 구호가 나돌고 있다. ‘그래, 예수마저도 교회라는 횡포 앞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되돌아 보게 한다. 만약 예수마저 교회가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교회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한국교회는 구조적 위기를 맞이했다. 교구체계를 무시하여 신자들을 무질서 속으로 유혹하는 교회의 교구 폐기론은 장차 더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자칫 교회 출입하는 행위를 명소 방문이나 유원지나 휴양지 찾아서 여가를 즐기는 식의 유흥과 레저식 쾌락으로 몰아가는 오늘의 대형 교회주의자들이 절망하는 날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지하교회나 남쪽 대한민국의 소수자요, 스데반의 친구 같은 이들은 언젠가 죽어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북쪽은 김정은의 권력의 광란이 발동하고, 남쪽은 말기 자본주의적 교회주의의 횡포 앞에서 인간 양심들이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절망의 날에, 스데반이여, 스데반의 동반자들이여! 당신들의 일어섬을 보고 싶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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