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방문했던 중국 타클라마칸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한 필자.


알로펜은 처소로 돌아와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국왕의 큰 형님이라는 노인에게서 풍기는 향기, 그래 향기라는 표현이 좋겠다. 늙은이었으나 늙은이 같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그에게서 느꼈던 인상을 향기로 표현하자.

그는 쫓기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한가로운 노인도 아니었다. 말 한마디, 살피는 눈길 한 순간마다에서 느껴오는 여유, 품위있는 말씨 등 그가 보여준 인상은 동방의 풍습이 말해주는 신선과 같다면 좋을 성싶었다.

그 어른처럼 살고 싶다. 타클라마칸에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다. 정착지도 마련하기 전에 허탄과 쿠차에 선교팀을 배치한 것은 조금 심했다. 스데반과 세비야는 잘 있는가. 허탄의 정통파로 자처하는 로마교구 어거스틴 주교 휘하의 젊은이들과 충돌은 하지 않을까? 쿠처는 또 어떤지? 요나와 앗스기아에게 미안한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된다.

아라비아에서 와 있다는 청년들은 누굴까? 에치오피아 선교단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그곳에서 상당한 선교의 실적을 옮긴다는 소식은 내가 어릴 때부터 들었다. 그럼 그들이 혹시 카라반을 따라서 이곳까지 왔을까?

알로펜이 천불동 다녀온 지 사흘되던 날 왕궁에서 사람이 왔다. 알로펜을 초청하는 국왕의 형님으로부터의 전갈이었다.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안토니가 들어와서 국왕의 형님의 초대 사실을 알리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뭐,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함께 도를 말하는 이들이 만나는데….”

“그래도….”

“뭐가 그래도인가. 그는 왕의 자리도 사양하고 진리를 그리면서 사는 사람인데, 호탄의 값비싼 옥돌처럼 팔색빛깔 반짝이면서 나를 반겨줄 것일세.”

저녁때 알로펜은 혼자서 가겠다는 것을 쿰바홀과 안토니가 극구 말려 그들 둘이 알로펜을 국왕의 형님 국상태의 집으로 안내했다. 국상태는 궁궐로부터 떨어진 곳 천불동 가는 산길 중턱에 집이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큼지막한 자태를 뽐내고 뜰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실바람에 한들거린다. 석양빛 사위어 가고 있는 시간 집담장이 모두 사람의 키 높이 정도의 나무들로 둘러있다.

국상태가 몸소 마당 한복판까지 나와서 알로펜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알로펜 주교님!”

국상태는 천불동에서 보았던 모습, 그 복색대로 알로펜을 맞았다.

“높은 어르신의 초대를 받고 보니 소생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침을 원하옵니다.”

“별, 별 말씀….”

그는 알로펜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이끌어 그의 별실로 안내한다.

“여러분도 같이 오르시죠. 아이구, 쿰바홀 내 친구도 오셨구먼. 자네가 서양 귀빈을 잘 모신다는 소식 들었네. 고맙네. 어서들 들어와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집안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럼 두 분 편한 시간을 가지세요.”

쿰바홀이 안토니와 함께 제2의 별채로 안내받았다. 이 방은 국상태가 마니교 교사들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리고, 도교 사람들로부터 붓글씨를 배우는 방이다. 방이 아니라 화실이고 서실이다.

국상태는 알로펜의 자리 안내를 하고 자신도 자리잡았다. 방안을 둘러보는 알로펜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묻는다.

“국상태 상왕님을 찾습니다.”

“허어, 상왕이라니요. 나는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첫마디에 농으로 나오시는지요.”

“농이라니요. 이 방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하얀 벽면들 뿐인지라 조심스러워서요.”

“조심스럽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온통 하얀 색깔들이니 때묻힐까, 조심스럽기도 해서요.”

“아하, 불편하신가 보군요. 그러지 마세요. 이 방의 벽에다가 어떻게 사는게 참인가, 한 자 적어주시구려.”

“그거 알면 제가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어허, 거 무슨 말씀. 아시아를 깨우치려고 오신 주교님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죠.”

“아닙니다. 저희는 하나님이 사람처럼 사셨으니 사람 또한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 배웠는데,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가능하겠는가 하면서 지금 세상을 주유하면서 여기까지 왔네요. 일단 저는 어른을 선사로 호칭하겠습니다. 선사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국상태는 알로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알로펜은 긴장했다. 내가 혹시 무슨 말을 잘못했는가. 국상태는 눈을 감은 채 천정을 우러르고 있었다. 조심스러웠다. 한참을 천정을 향한 채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방안이 떠나갈 듯이 웃는다. 무릎을 치면서 헛허허….

“어르신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오, 아니야. 실수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 내가 오랫만에 십년은 씹어야만 맛을 알아낼 듯한 주교님의 말씀을 들어서 이러는 것이요. 뭐, 하나님이 사람처럼 살았으니 사람도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아,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그냥 제가 요약해 보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이가 사람으로 오신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 알로펜을 대신해 죽었으니 내가 또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고백은 기본이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요. 그래서 저희는 천하를 내 집 삼아 떠돌면서 우리에게 배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을 찾고 있답니다.”

“갈수록 태산이구려. 주교님은 지금 나를 고단수 논법으로 포위하려 들고 있어요. 그럼 내가 방어해야 하는데 이를 어찌합니까. 나는 언젠가부터 마니 선생의 가르침에 심취해 있지요. 마니교는 사람은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지요. 그저 늘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의 덫에 걸리지 말고 살아가는 정도이죠. 저 또한 그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주교님은 온 세상을 홀로 책임질 듯한 기세로 내게 압박을 가하는군요.”

“아니, 압박이라뇨. 그 무슨 말씀이세요.”

“아, 네. 선의의 뜻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배움을 부탁드립니다.”

“저두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상당히 오랜기간, 그러니깐 최소한 10여 년은 어르신의 나라에 머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있는데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요. 그럼 내 아우 국문태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구하세요. 그는 주교님을 저보다 훨씬 더 좋아할 겁니다.”

“그런가요. 국왕께서 저 같은 종교인을 좋아하다니요.”

“아니요. 종교인이 아니라 주교님 같은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좋아할거예요. 그는 중국식이거든요. 예와 지혜를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아, 네. 그런데 저는 어르신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그런가요. 그럼 나도 좋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상태는 밖으로 나가자면서 알로펜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 좋은 밤이다.”

밤하늘이 청명하지도 않은데 국상태는 두 손을 펴들고 가슴을 열고 하늘을 우러른다. 쿰바홀과 안토니가 나무숲 의자에 앉았다가 달려 나왔다. 안토니가 한 발 앞서 나오면서 국상태 노인에게 머리숙여 인사를 드린다.

“전하! 인사올립니다. 저는 알로펜 주교님을 수행하는 안토니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제 아우입니다.”

알로펜이 안토니의 인사를 거들었다. 국상태는 기분이 좋았다. 웃으면서 안토니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그래요. 좋은 우리 만남입니다. 그리고 쿰바홀 그대가 큰일을 한다더군. 자네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처럼 사는 법을 똑바로 배우고 실천하여 우리 코초국과 기독교의 영광에 참여하게나.”

“아, 네, 네. 왕이시여. 제게도 늘 가르침을 주소서.”

“엣기 이 사람, 내가 무슨 왕인가? 왕이 계시는데 내가 또 왕이라면 자네와 나는 목이 열개라도 감당 못하네. 입조심하게.”

“네, 그럼 하늘 높은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사람 참 허풍스럽긴. 자네를 그래서 내가 좋아한다네. 앞으로 주교님께 내 몫까지 충성하게. 꼭.”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쿰바홀은 선 자리에서 덥석 주저앉아서 감격스러워 한다. 국상태 노인이 쿰바홀을 일으켜 세우더니 어깨를 툭툭 치면서 친근함을 표한다.

알로펜 일행은 저녁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 어른의 경륜이 대단해 보이더군요. 마치 교주 같은 느낌도 들고, 교주 따위의 형식을 뛰어넘는 자유인이더군요. 그분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안토니의 국상태 노인에 대한 호감에 알로펜도 동의하였다. 알로펜의 눈에도 국상태 노인은 그 무엇에도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자유인이고, 종교들의 간격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제자교육 시간에 들어가려던 알로펜은 궁중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그는 국왕이 알로펜을 오늘 점심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을 가지고 왔다.
“빠르구나. 국상태 노인이 그의 동생이 국왕에게 알로펜을 소개한 모양이지.”

안토니가 왕궁에서 온 연락관이 떠난 뒤 쿰바홀에게 한 말이다.

“국왕은 형님보다 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종교의 힘을 빌려서 자네 왕국의 번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코초국이 중국의 보호를 받지만 이전만 해도 흉노 세력들로부터 얼마나 고난받았습니까.”

“그렇군요.”

알로펜은 안토니와 쿰바홀의 대화에 관여하지 않고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전도자 교육을 위해 강의실로 들어갔다.

“점심 초청이니까 곧바로 준비해야겠군요.”

쿰바홀이 서두른다. 알로펜은 왕궁으로 들어갔다. 안토니와 쿰바홀이 그를 수행했다. 국상태를 만나러 갈 때와는 달리 긴장되었다.

“떨립니다. 주교님은 어떠세요?”

안토니가 알로펜에게 속삭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우리가 황제인들 두려워할손가.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복음의 사신일세.”

안토니는 내가 실수했구나를 생각하며 말없이 한 발 물러섰다. 소왕국이라지만 궁궐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쿰바홀이 앞서 나서서 알로펜을 안내했다. 국왕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접견실로 가기 전 알로펜이 안토니의 손을 꼭 쥐어주면서 미소지었다. 왕궁 오는 도중에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을 의식한 듯 했다. 안토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주교님. 제가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그때 국왕의 비서가 와서 알로펜을 인도해갔다. 알로펜을 반갑게 맞이한 국왕은 알로펜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주교님, 내 형님께서 크게 감동하셨더군요. 그분은 어지간해서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분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왕이나 점령군 사령관이 공격해 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분입니다. 부처님이 오신다해도…, 그런데 주교님을 만나시고는 내게 극찬이십니다. 절더러 주교님 계시는 곳으로 당장 찾아뵈라는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또 내가 주교님을 찾아가면 여러 사람이 불편할 것 같아서요. 이렇게 봬서 반갑습니다.”

“아, 네. 저도 영광입니다. 전하께서 저희들의 선교활동을 많이 후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럼요.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그러나 우리 고창국은 조금 여유가 있다할지 모르나 사막지대의 성곽국가들 어느 곳이나 넉넉하지 않죠. 저는 주교님의 기독교 활동에 무조건 찬성합니다.”

국문태는 기독교에 대한 정치적 기대를 넌지시 하고 있었다.

“주교님,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잖아요. 중앙아시아나 서역지역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저 북방 흉노들로부터 시달리고 중국 또한 예외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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