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想>에서 〈思想界>로, 그리고 그 의미-



              박정희 독재 투쟁 시절 장준하와 함께.


# 서영훈-고형곤-박마리아-이승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만은 장준하와 생(生)을 함께 하리라 했던 서영훈이었는데, 일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돼 버린 것이다.

장준하의 인물됨에 깊이 감동한 바 있는 서영훈은 장준하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으리라 했다. 이화여대로 고형곤을 찾아간 것도 그래서였고, 또 그 고형곤을 통해 박마리아 학장을 만난 것도 그래서였고, 그 박마리아를 만나 잡지 〈思想>의 주필 장준하를 자신이 아는 그대로 소개한 것도 그래서였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잡지 〈思想>은 사실은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로서, 문교부장관 백낙준 박사의 정신적인 후원을 입고 있다”고 까지, 이제까지 있어온 사실을 진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곧 탈이 된 것이다. 백낙준? 잡지 〈思想>을 문교부장관 백낙준이 후원하고 있다는 말이 박마리아의 밸을 뒤틀리게 했다. 박마리아는 한국 정치에 특심을 품은 여인이었다.

남편이 일찍이 서울시장을 거쳐(1949~50년) 지난해는(1951년)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같은 해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한 둘째가라면 얼굴을 붉힐 만큼의 철저한 이승만맨이었다.

이기붕의 이같은 전역은 거의가 박마리아의 작품이었다. 박마리아에겐 꿈이 있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의 남편 이기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후계를 잇게 하는 것, 자도 깨도 그녀는 그 꿈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드디어 박마리아는 남편 이기붕으로 하여금 전쟁 중의 국방장관이라는 중책을 접고, 1951년 광복절 이후부터 자유당을 창당하는 일에 전념케 했다.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애국신당을 조직하라’는 이승만의 발언을 명(命)으로 받든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이기붕 일가에 서서히 다가오는 흑암의 그림자를 박마리아는 알턱이 없었다.

오직 한가지 일, 이승만 재집권을 실현하고, 그러면서 남편 이기붕을 확실하게 2인자의 자리에 모셔(?) 올리는 것, 그 일에만 미쳐있는 박마리아였으니,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사망의 그림자’였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피난 수도의 정국은 자신의 바라는대로 진행되어 가는 듯했다. 내년(1952년) 8월이면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 정권이 무슨 재주를 부린대도 대통령 재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원내 세력은 의원내각제 지지세력이 절대 의석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오직 이승만을 위한 이승만의 정치


그럼에도 이승만 재집권을 내부적 목표로 창당된 자유당은 재집권을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11월 28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국회의민·참양원제와 함께)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1952년 1월 18일 개헌안에 대한 국회표결은 압도적인 표수차의 부결로 나타났다.

그러나 권력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강제 연행되고, 국제 공산당에 연계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10명의 국회의원을 체포했다. 군과 경찰, 온갖 테러조직들을 동원해 민중을 겁먹게한 이승만은 다시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 이의 찬성과 거부를 ‘기립(起立)’으로 결정하게 했다.

이른바 ‘발췌개헌안’이라는 것이다. 1952년 7월 4일 밤이었다. 그리고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이승만은 재선의 꿈을 이룬다.

박마리아의 꿈은 이제 야욕이 되어 간다. 이제야말로 남편 이기붕을 띄울 때이다. 이범석이 제거되었고, 이제 이승만 이후를 다루는 정적이라면 장택상, 백낙준 정도가 있을 뿐이다.

장택상은 인품으로나 저력으로나 별 문제될 것 없었지만, 백낙준은 마음에 걸렸다. 특히 그의 인품에서 그랬다. 나이는 이기붕보다 한 살 위였고, 프린스톤과 예일대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 연희대의 총장으로 있던 때, 자신의 남편 이기붕은 이승만의 이화장에서 주방담당 비서로 있었다.

후란체스카를 졸라 이승만의 시혜를 입어 서울시장, 국방장관을 했다지만 누가 봐도 백낙준이 이기붕 보다는 한수 위라는 사실은 어쩔수가 없었다. 이승만 주위에서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이었다.

박마리아는 서영훈으로부터 〈思想>사의 대표가 김구의 비서를 역임한 바 있는 장준하라는 것과 그의 격(格)있는 후원자가 백낙준(특히 흥사단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서영훈이 돌아간 후 학장실의 조교들을 시켜 〈思想> 1호부터 4호까지를 구해오게 했다.

잡지에 글을 쓴 필자들과 대체적인 내용을 챙겨본 박마리아는 ‘백낙준은 안 돼’했다. 제거해야겠다는 말이었다.

서영훈이 고형곤을 통해 박마리아를 만나고 돌아온 며칠 후, 장준하는 백낙준으로부터 의외의 전화 한통을 받는다.

“학교가 아닌 내 집으로 오게….”

감이 좋지 않았다. 이상스럽게도 전에 없던 경험을 하게 했다. 맘 저 밑에서 서허한 바람이 일어오르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웬일로 장관께서 보자하시는 걸까?…”

궁금했돈 것과는 달리 백낙준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온화했다. ‘다행이다’했다.
“장비서.”(백낙준은 장준하를 그렇게 불렀다. 김구의 비서로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장비서. 내가 어제 대통령을 뵙고 왔어….”

한동안 백낙준도 장준하도 말없이 멍한 모습으로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처음 뵀을 때 모습, 평안한 모습인 듯해서 안심했는데, “나 어제 대통령 뵙고 왔어” 하는 첫마디에 장준하는 글자 그대로 중압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백낙준은 아주 조용한 음성으로 서영훈이 고형곤의 소개로 박마리아를 만났다는 것, 만나서 잡지 〈思想>의 정신과 경영사정을 자세히 보고했다는 것을 장준하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백낙준의 말을 들으면서 박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속으로 ‘아-하!’ 했다. 백낙준이 들려주는 말은 이미 서영훈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서영훈이 만났다는 그 대학의 여학장이 박마리아였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자기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서영훈도 자신이 만난 그 여교수가 이기붕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장준하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백낙준의 말이 이어진다.

“그런데 장 비서, 그 박마리아 교수가 말일쎄, 대통령 내외와 식탁에 마주앉아 〈思想>이라는 잡지가 아주 불순한 자들로 운영되는 거라면서 먼저 백낙준 이야기가 있었다는거야. 그거 〈思想>이라는거 후원하지 말라고 말야.  그리고 USIS 에서 종이 값 지원도 못하게 하겠다는거고, 또 어떤 국회의원 한 사람 이야기도 하더군. 일체 지원하지 못하게했다고 말야.”

그러면서 백낙준은

“오히려 내가 장비서에게 미안하게 됐어. 정말 함께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한번 해보고 싶었던건데…”.

장준하는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잡지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격려가 있어 기를 펴보려던 참이었는데….

“장관님, 오히려 정말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잡지의 운영에 사면을 잘 살펴갔어야 했는데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동안 여러 모양으로 〈思想>을 지원해 주신것 감사합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새출발을 해보겠습니다.”
이렇게하여 장준하는 백낙준 문교장관의 사저를 돌아나오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어려운 길목에서 마다 귀한 손이 되어주었다. 장준하가 백낙준의 사저를 돌아나오는 그때 그가 그처럼 사랑했던 〈思想>도 함께 숨을 거두고 있었다.


#〈思想>에서 〈思想界>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서영훈-고형곤-박마리아 그리고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월간 〈思想>의 사건은 인간 장준하에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어서 장준하에게 더할 수 없는 자랑스런 미래로의 가교가 열리게 한다.

백낙준의 집을 돌아나올 때는 그 의기의 사내 장준하도 별수가 없었다. 분하기, 원통하기 이보다 더 할 수 없었다. 몸통을 조국에 바쳐 살자했던 나, 조국이 나에게 이럴수가 있는 것인가? 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뭘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장준하에게 있는 것 하나, 다음 호를 준비하기 위해 받아놓은 원고들이 있었다. ‘잡지는 이제 못내게 됐고, 그럼 원고는 어떡한다?’, ‘원고를 돌려 줄수는 없다. 버릴 수는 더구나 없다’ 그렇게 한밤을 지새우는 동안 그는 결단을 했다.

‘이제는 정말 내 손으로, 내 손만으로 잡지를 낸다!’ 하는 결단이었다.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장준하 자신의 결단이 아니었다. 장준하를 역사의 사람으로 이끌어내려는 하늘의 섭리였다.

‘내가 시작한다. 나, 내가 한다!’. 이 결단 후에 장준하는 자신의 현실을 훌쩍 뛰어넘어 미래로 간 듯했다. 헌대 일이 결코 녹록지를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장준하의 모든 일을 아예 영(零)으로 돌려놓기로 하신듯 했다.

잡지 발행은 고사하고 〈思想>이라는 그 잡지의 이름도 자신이 사용할 수가 없는 법치하에 있음을 장준하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 잡지 〈思想>은 몇 가지 행정, 운영상의 이유로하여 국회의원 이 모 씨로 잡지의 발행인을 대행케 하고 있었고, 물론 잡지의 판권 역시 그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교부 산하기구로부터 독립하여 자주하는 〈思想>을 발행하기 위해 판권을 회복해야 하는 터에 국회의원 이 모 씨의 판권 불포기 고집으로, 하는 수 없이 장준하는 원래의 잡지 〈思想>에 ‘界’자 한자를 더하여 〈思想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더한 글자 ‘界’는 전의 〈思想>과 똑같은 글자체였다. 이렇듯 〈思想界>라는 이름은 이전의 제호였던 〈思想>에 ‘界’가 한자만 더 붙인 것으로 글자 한자가 달라진 것이었지만 그 변화의 이면엔 이후 1975년 8월 17일, 한국 현대사 속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체를 헌신한 민중지도자로서의 장준하가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그의 조국을 숨져 떠나는 날까지 거룩한 장도를 살게하는 거룩한 성소(聖素 : Holy Oliment)가 흐르고 있었다.

그 성소란 곧 관(官)에서 민(民)으로, 제도권(制度圈)에서 시민권(市民圈), 민중권(民重圈), 재야권(在野圈)으로의 도약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 장준하가 하늘로부터 입은 은혜라는 것이다. 장준하가 이후 자유당 이승만의 독재 치하에서 거룩한 싸움을 싸우며, 4·19의 혁명의 불길을 붙여대기까지의, 5·16 군사쿠테타 세력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을 다하기까지의 민주, 민족, 자유혼의 선각자로서의 싸움은 거의 관보(官報)에 가까운  〈思想>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말이다.

장준하가 운(?)이 좋아 백낙준과 함께하는 세월을 살았다면, 그리고 백낙준이 운이 좋아 이승만의 후계의 자리를 장악하게 되었다면 후에 씨알의 창도자로 세계에 새 사상을 제시하게 되는 함석헌과의 조우는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思想>이 아닌 〈思想界>로만, 관(官)이 아닌 민(民), 제도권이 아닌 민중 세상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思想>을 이승만에게 빼앗겼던 장준하의 설움, 그것은 후에 한국 민중사(民衆史)의 봉화가 되는 〈思想界>로 현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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